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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근래의 수필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서

by 아네모네(한향순) 2021. 3. 9.

 

 

연암의 발자취를 따라서

                                                                             한 향 순

 

사진 속의 사람들은 한껏 웃고 있었다. 낯선 여행길에서 들뜬 감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재미있고 즐거워서였을까. 2007년 오월, 오랫동안 함께 수필을 쓰고 공부하던

산영수필문학회 회원들이 이정림 선생님을 모시고 중국으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따라서 문학기행을 떠났다.

강의실이나 딱딱한 공간에서 만나던 문우들과 며칠간의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만남의 기회이기도 했다.

 

즐거움에 들뜬 문우들은 조그만 일에도 어린아이들처럼 까르르 웃고 떠들며 모두 나이를 잊은 모습들이었다.

더구나 열하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으로

재편집 하신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이었다. 우리는 베이징에서 출발해 고북구(古北口) 장성을

통과해 금산령(金山嶺) 장성을 본 후 승덕(承德)을 다녀오는 코스였다.

 

버스가 베이징을 출발한 후, 고선생은 낭랑하고 거침없는 말솜씨로

자신이 연암 박지원을 만나게 된 과정부터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낭독의 중요성과 낭독문화에 대하여 말했다. 곡기가 끊어져도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옛 선비들의 이야기에 이어 열하일기에 나오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낭독했다.

하지만 이것은 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하(遼河)가 일찍이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특히 밤에 건너보지 않은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이 오로지

위험한 데만 보느라고 도리어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하는 판인데, 들리는 소리가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으니, 오로지 듣는 데만 있어

바야흐로 귀가 무서워하여 걱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힘차고 또렷한 낭독이 이어졌다.

 

연암은 나는 이제야 도()란 어떤 것인가 알았다. 마음이 깊은 사람은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구애되지 아니하는데, 귀와 눈을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에

더욱 힘써서 그것이 더욱 병폐가 된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서재에 앉아 머리로만 사유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길이 곧 글이고, 삶이 곧 여행이었다.

연암이 지나갈 때마다 중원천지에서 침묵하고 있던 단어와 문장들이, 그리고 이야기들이

잠에서 깨어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연암은 그런 것들을 열정적으로 쓰고, 쓰기 위해서 다시 걸었다.

 

열하는 북경 동북쪽에서 230km 떨어져있는 곳으로 온천이 많아 겨울에 강물이 얼지 않아서

'열하(熱河)'라고 부르는 지역이며, 청나라 황제들의 피서지로 이용되었으며 산장들이 있는 곳이다.

건륭제가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지었다는 소포탈라궁이 뒤로 보이고,

황제가 먹었다는 만한전식을 우리도 약식으로나마 맛보고 나온 길이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길은 젖어있고 여기저기서 문우들이 기념촬영을 하던 차에

재빨리 이선생님과 고미숙 선생을 낚아채듯 포즈를 잡았을 것이다.

 

그때가 불과 몇 해 전인가 했더니 벌써 14년 전의 사진이니 선생님은 물론 우리도

그나마 건강하고 팔팔하던 시절이었다. 장난기가 많은 고선생은 촌스런 이름표를 달고 가운데서

익살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고, 이정림 선생님도 환한 웃음으로 그날의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다.

왼쪽의 단발머리의 여인은 삼십여 년을  곁에서 함께 해준 문우 이춘희씨다.

 

지금 생각하면 여행길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배운 것보다는 여행을 하면서 많이 웃고,

서먹했던 문우들과 친숙해진 것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 순간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을 만큼 힘겨운 때가 가끔 있다.

사람들이 과거를 아름답게 회상하고 추억하는 것도 현재가 힘들고 괴롭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난해는 누구나 견디기 힘든 한해였을 것이다.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 일자리를 잃고

생계를 위협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족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병석에서 홀로 숨져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이런 재난상황이 오리라고 예상할 수 없었기에 두렵고 힘들어도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며 답답함을 달랬을지 모른다.

 

추억의 사진을 보며 삶의 여행길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환한 웃음이 있던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본다.

다가오는 봄날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얼었던 강이 풀려 예전처럼

같이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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