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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근래의 수필

안개에 갇히던 날

by 아네모네(한향순) 2022. 3. 26.

 

안개에 갇히던 날

 

                                                                                                                                한 향 순

 

지난 해, 지척을 분간 할 수 없는 해무 속에 하루 종일 갇힌 적이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해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릴 만큼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굴업도에 며칠 머물렀다.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 날, 아침부터 바다에서 희뿌연 안개가 밀려오더니 점점 섬을 삼켜버리고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해무의 기세가 얼마나 무섭고 빠른지 종종 화재현장에서 보았던 뿌연 연기 같았다.

해가 올라오면 안개가 좀 걷힐 것이라는 바람 속에 종일 기다렸으나 해무는 거센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배가 뜨지 못할 거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도 행여 늦게라도 오지 않을까 싶어

눈이 빠지게 망망대해를 바라보았으나 끝내 배는 오지 않았다.

섬 여행을 할 때는 일기예보를 철저히 살피고 결정하였기에 풍랑 걱정은 했어도

이런 사태가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일행 중에는 섬을 나가서 중요한 업무를 보아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먹던 약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다른 약속으로 애가 타는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배를 타려고 선착장에서 기다리던 일행들은 트럭을 타고 민박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허탈해 하였다.

굴업도에는 조그만 마을에 열 가구정도가 살고 있는데 교통편이라야 마을 이장님이 운영하는 트럭이 고작이다.

그것도 미리 예약을 해야 마중을 나오는데 트럭 짐칸에 짐과 사람을 함께 싣고

마을에 도착하면 옹기종기 붙어있는 조그만 집들이 보인다.

굴업도(掘業島)’라는 섬의 이름은 사람이 엎드려 일하는 모습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마을 너머에는 하얀 백사장이 둥글게 펼쳐진 큰말 해변이 누워있다.

인천시 옹진군에 있는 굴업도는 백 년 전 까지만 해도 천 여 척이 넘는 배가 모여들어 민어 파시가 열렸던 곳이다.

선원과 상인들이 이천 명이나 북적였고 그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노리는 술집도 번성하였다고 한다.

19238월에 큰 태풍이 몰려와 천 여 명이 피해를 입었고 동섬마을의 민어 어획량이

줄면서 어장은 서서히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몇몇 주민들만 남아서 마을을 지키는 이 조그만 섬에는 한창 번성할 때 사람들이 살던 집터와 전신주등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배가 오지 않자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할 수 없어 우리는 깊은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토끼섬 해식동굴을 찾아가기로 했다. 안개가 짙은데다 초행길이라 앞사람을 부지런히 뒤쫓아 갔는데,

그만 일행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뿌연 안개의 벽 속에 갇혀 방향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했다.

일행들과 얼마나 멀어졌는지 목청을 높여 그들을 불러보아도 파도소리에 섞여

내 목소리마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리 걸어도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숲과 하얀 모래톱만 보일뿐,

이정표 같은 바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러다가 종일 혼자 고립이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러자 공포감과 함께 일행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안개속이라지만 동행을 확인하지도 않고 무작정 떠난 그들이 야속했다.

화도 나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의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행들도 내가 보이지 않자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구원의 음성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희미한 물체들이 조금씩 보이며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내가 애타게 찾던 일행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병균이 우리 삶에 난입한지 이년이 넘었다.

우리 개인의 일과가 낱낱이 기록되고 소소한 일상까지 제약을 받으며 모두 힘겨워 하고 있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허우적대는 답답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작년에 이태리의 유명 작가인 파올로 조르다노<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라는 책을 펴내서 호평을 받았다.

그가 말하는 전염의 시대는 초 연결 사회다. 빠르고 효율적인 교통망은 바이러스의 수송망이 되었고

현대사회가 이룬 성취는 도리어 형벌이 되었다고 말한다.

전염의 시대는 보편의 고독을 불러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러스 앞에 인류는

모두 공평하며 각자의 운명은 모두 연결돼 있음을 알려 준다.

또한 극심한 공포는 불신의 고리에서 나온다고도 하였다.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안개 속 같은 불안한 나날을 잘 버티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불신을 쌓아두지 말고 가능한 일상 안에서 꿋꿋하게 버티며

희망의 빛을 찾아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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