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 울 산
아파트 숲 너머로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하얀 산을 본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낯익은 배경의 소품 같던 “구룡산”의 모습이 오늘은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마치 객지에서 방황을 하던 나그네가 고향을 그리워하듯, 바쁜 일상에 쫓겨 자주 오르지 못했던 산이 그리움으로 묻어나기 때문이다.
오래전, 나는 겨울 산을 무척 좋아했다. 결혼도 하기 전인 이십여 년 전 내가 다니던 직장에는 산악회가 있어 주말만 되면 배낭을 챙겨서 집을 나오곤 했다. 그때는 주로 북한산이나 도봉산등 시내 가까이 있는 산을 다녔는데, 등산인구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라 겨울 산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추운 날, “뜨뜻한 아랫목을 놔두고 왜 사서 고생하러 가느냐.”며 말리시던 엄마의 잔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을 나서면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듯 마음이 설레곤 했다.
털목도리와 두꺼운 장갑으로 무장을 하고 산 입구에 다다르면 산자락에서 묻어오는 공기부터 다른 것 같았다. 앞서거니 뒤서기니 하며 모여든 일행들을 만나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어느새 호흡은 거칠어지고 등허리에는 땀이 배이기 시작했다.
오르기로 한 목적지에 다다르면 우선 추운 몸을 녹이기 위해 마른 가지를 주워서 모닥불을 피웠다. 그리고 언 손을 불어가며 버너를 켜고 코펠에 하얀 눈을 가득 담아 물을 끓여서 밥과 찌개를 만들어 먹으면 기막히게 맛이 좋았다. 식사를 끝내고 산중에서 마시는 커피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다.
겨울산은 어쩐지 쓸쓸하다. 여름내 풍성하던 나뭇잎도 헐벗고 물기가 걷힌 골짜기에는 낙엽이 쌓인 채 흰 눈이 군데군데 융단처럼 깔려있다. 여름에는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앙상한 나무들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올곧게 위로 뻗은 놈이나 용트림을 하며 옆으로 굽은 나무, 그리고 손바닥 펼치듯 사방으로 가지를 펼친 것 등 모두가 제각기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사람의 사는 모습도 비슷할 것이다. 잘생기고 못생긴 사람과 똑똑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살아가므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리라. 산을 오르다가 마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힘드시지요.” “수고하십니다.” 모르는 사람과 나누는 한마디의 말이 힘을 솟구치게 하고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산의 넉넉한 품에 안기면 사람의 마음도 자연을 닮아 푸근해지고 넓어지는 모양이다.
오 년 전 겨울, 정 붙이기 힘들 것 같던 이 동네로 이사해서 제일 반가웠던 것은 아파트 근처에 산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창문만 닫으면 추위를 모르는 편한 아파트 생활이었지만, 무언지 모를 허전함 때문에 아이들과 자주 산을 찾았다. 이웃들과 사귀고 친해지기보다 먼저 겨울의 구룡산과 친숙해진 셈이었다.
산 입구에서 쉬엄쉬엄 한 삼십 분쯤 오르면 산의 정상에 다다른다. 꼭대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성냥 곽을 엎어놓은 듯한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우리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많은 집들 중에 조그만 내 삶의 터전도 있다고 생각하면 뿌듯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찬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시며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려가듯 살았던 시간들이 속절없게 느껴지고, 사람과의 부대낌 속에서 받았던 상처들이 치유되어 부드러운 화해의 심성이 된다. 비로소 따뜻하고 편한 아파트 생활에 선뜻 마음 붙이지 못한 것이 바고 흙에 대한 상실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시멘트벽으로 흙의 기운을 차단한 듯한 아파트는 어쩌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마음까지도 단절시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땅이 뿜어 올리는 기(氣)를 받지 못해서 시들어 가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인지도 모르겠다.
자연의 목소리는 훨씬 감동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순리에 역행하는 법이 없이 절기를 지키며, 시들고 썩은 낙엽도 새봄에 싹을 틔우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산은 우리에게 땀을 요구하는 대신 무거운 침묵을 통해서 겸허와 인내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오늘은 눈이라도 올 것 같이 하늘이 잿빛으로 흐려 있다. 사는 일이 허전하거나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질 때, 인간적인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의연하게 서 있는 산을 본다. 아무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꿋꿋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산. 널찍한 가슴으로 모든 것을 포용하며 휴식과 생명력까지 나누어주는 산처럼 나도 그렇게 넉넉한 인품을 지니고 싶다.
199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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