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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잔혹한 역사앞에서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8.

잔혹한 역사 앞에서

 

  그날따라 햇볕은 작열하듯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빨간 벽돌 건물이 줄지어있는 정문 앞에는 철제로 된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일을 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가 폴란드어로 적혀있었다. 그것은 독일 나치들이 유태인들을 죽이는 날까지 노동현장으로 끌고 가서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내건 표어라고 한다. 동유럽 관광길에 포함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니 몇 년 전에 본 영화 <쉰들러즈 리스트>가 생각나며 어쩐지 잔뜩 긴장이 되었다.

 

  안내자를 따라 정문을 통과하니 수용소로 쓰였던 28동의 건물이 세 줄로 나란히 서 있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증거 관으로, 수용자들이 입고 있던 푸른 줄무늬의 죄수복과 그들이 사용하던 식기나 스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안경, 칫솔, 가방 같은 수많은 소지품들이 당시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어느 방에는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나치들이 개발하였다는 티크론 가스통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조그만 깡통 하나가 400명을 죽일 수 있는 살인 무기였다니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유태인 말살정책은 히틀러의 티 케이 작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생존가치가 없는 심신장애자 20만 명을 죽였는데, 경제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경제권을 쥐고 있는 유태인들을 독일의 국민감정에 악용(惡用)하여 대량 학살로 합리화시킨 것이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퍼져있던 유태인들은 유토피아와 같은 집단 이주시설을 만들었다는 나치의 꼬임에 속아 모두 폴란드로 몰려든다. 원래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어로 축복 받은 땅이라고 하는데, 유태인들의 끔찍한 지옥에서 지금의 전 인류의 성지(聖地)로 바뀌었다.

 

  더구나 나치들은 유태인들에게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가볍게 들고 오도록 하여 사람들은 그 당시 유행하던 가죽트렁크 하나만 달랑 들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유태인들이 꿈에 부풀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그나마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은 수용소에 남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소지품을 빼앗긴 채 샤워 실이라고 속인 가스실로 직행하여 곧바로 독살되고 말았다. 증거 관에는 그들이 샤워만 끝나면 곧 다시 찾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써넣은 가죽가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발길을 옮기면 옮길수록 더 처참한 광경들을 볼 수 있었는데, 형벌 시설이 있는 11동이었다. 반복해서 2만 명을 죽일 수 있다는 죽음의 벽, 사방 1미터밖에 안 되는 곳에 4명씩 집어넣어 며칠씩 서있는 고문을 하게 하는 ‘서 있는 방’샤워를 시킨다고 한꺼번에 400명씩 집어넣어 살포하던 가스실 등이 참혹한 역사를 말해주었다. 지금은 비록 조용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그때의 아비규환이 들리는 듯하고 벽에는 안간힘을 쓰며 죽기 전까지 남긴 낙서로 필사의 항거를 하고 있었다. 그곳을 보고 나니 분노와 경악을 넘어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네 번째 블록에는 나치들이 유태인의 머리에서 잘라낸 머리카락이 7톤이나 쌓여 있었다. 그것은 1945년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고 찾아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는 어린 소녀들의 땋은 갈래머리도 있어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어린아이들의 머리카락까지 잘라내어 카펫을 만들었다니 아무리 전쟁으로 인한 집단적 광기(光氣)라곤 하지만 “인간의 잔혹성이 과연 어디까지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더구나 생체실험을 하기 위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을 이용했다니, 초점 없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물론 전쟁과 싸움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역사는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행해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과 노인들,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합쳐 600만 명을 죽였다니, 아우슈비츠는 살육의 현장이요, 살인 공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의 그곳에는 독일인이나 유태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보려고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중국 땅을 관광하다가 남경에 들른 적이 있다. 그곳에도 일본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남경대학살 기념관’이 있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은 중국의 난징에서 양민 대학살을 자행하였는데, 백기를 든 포로는 물론 수만의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까지 무차별 살상을 가하여 30만 명이라는 희생자를 냈다. 며칠 사이에 시체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시뻘건 피는 개천을 이루어 항주까지 흘렀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방에다 산처럼 쌓인 해골들과 갖가지 유골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군의 잔혹성을 알리기 위해 그 당시의 학살 장면의 사진과 증거품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그 끔찍한 살생이 단순히 중국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라니, 일본인들의 만행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간혹은 일본사람들도 찾아와 조상들의 죄업(罪業)을 빌기 위해 사죄의 뜻으로 종이학을 접어놓고 간 사람들도 있으나 아직도 일본은 그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고 한다.

 

  하기는 일본군의 잔인함을 우리만큼 잘 알고 피해를 본 민족도 드물 것이다. 일제 36년 동안 그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짓은 얼마나 처참하고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이었던가. 전쟁 위안부를 비롯해 “마루타”란 생체실험 희생자까지 무수히 양산시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그들의 잔혹성을 알리고 증거로 남길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는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되, 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빅토리 에밀 프랑크라는 작가는 “살아 있는 것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형벌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폴란드의 공영방송에서도 나치의 만행에 대하여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고 전 국민에게 발표했다고 한다. 독일의 빌리브란트 수상은 아우슈비츠에 찾아와 통곡으로 사죄하였고 독일학생들은 이곳이 수학여행의 필수코스라고 한다.

 

  청산한다는 것은 자기의 죄를 책임지는 것이다.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나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죄업을 책임짐으로 해서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청산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도 이곳에 와서 많이 보고 느끼며 더 이상 역사를 왜곡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두 시간여의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뜨겁던 태양은 구름 뒤로 숨었고, 수용소 마당에는 쓸쓸하게 흙먼지만 일었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허탈한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200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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