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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고독한 바다의 나그네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8.

고독한 바다의 나그네

 

 

  첫사랑의 기억. 그것은 보랏빛처럼 아련하고 애틋하며 그리고 아픈 기억이다. 그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려니 새삼스레 마음이 설레고 가슴이 아려온다. 그를 생각하면 어쩐지 앨런 포우의 "애너밸 리"란 시가 연상처럼 떠오른다. 바닷가 왕국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애너밸 리가 어쩌면 그를 많이 닮은 것 같아서이다.

 

  T와는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컸다. 학년은 나보다 한 학년 위였지만 나이는 두 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어릴 적의 그 애는 항상 멀찍이 서서 동경의 대상이었을 뿐, 다른 애들처럼 같이 장난을 한다거나 놀이를 할 때 끼는 법이 없었다. 그 아이의 집은 우리 동네에서는 제일 부자인 파출소장 집이었고, 딸이 다섯이나 있는 딸부자 집에 금쪽같은 외아들이었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 공부도 잘한다고 하였고, 생김새도 훤칠해서 그런지 부잣집 도련님 티가 제법 흘렀다. 한 동네에 살았지만 어쩐지 나하고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아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 갈 때쯤이었던가. 그 아이의 엄마와 우리 엄마는 한 동네에서 아주 가깝게 지내셨는데, 어느 날 그 집에 엄청난 일이 생겼다. 귀부인처럼 해사하고 아름다웠던 그 아이의 엄마가 느닷없이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간 것이었다. 그 후로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무성했다. 갑자기 엄마를 잃은 여섯 아이들은 울고불고 하였고, 아이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며 폐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반찬이나 김치를 해서 그 집을 들락거리셨고, 그 집 큰언니는 걸핏하면 우리 집으로 달려와 도움을 청했다. 한 집안이 몰락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드디어 그 애 아버지는 먼 섬으로 좌천을 당했고, 그래도 아이들은 집을 지키며 끈질기게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은 우리 엄마에게 많은 것을 의논하며 의지하게 되었다. 엄마도 아이들이 측은해서 그 집에 자주 드나들다 보니, 아이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그와 나도 자연스레 오누이 같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어느덧 몇 년이 흘러 아이들의 지주였던 큰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더니 도피하듯 결혼을 해버렸다.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버린 그 애는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느라 휴학을 한 채, 비참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도록 수척해진 그와 동생들을 구하는 길은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그 동안 새엄마를 맞아 본심까지 변한 것 같은 아버지에게로 아이들을 보내는 길이었다. 엄마와 나는 오랫동안 그를 설득하였다.

 

  우리의 뜻을 받아들여 그 애 식구들이 섬으로 떠나던 날, 엄마와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그때부터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새엄마와 변해버린 아버지 밑에서 울분을 참으며 현실과 싸우기 시작했다. 친구라고는 철썩이는 푸른 바다와 갈매기뿐이라고 했다. 그는 늘 바다에 나와 시간을 죽이며 삶을 포기해 간다고 했다.

 

  쓸쓸한 바다의 왕국(kingdom by the sea)에서 고독한 나그네의 독백은 이틀이 멀다하고 나에게 날아왔다. 한창 감수성이 여리고 예민하던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던 아름다운 편지들이었다. 그 글들은 마술처럼 나를 아프게도 하고 마구 설레게도 하였다. 나는 그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고, 그의 삶의 등대가 되어주고 싶었다.

 

  우리의 우정 어린 편지들이 점점 다른 감정으로 변해갈 즈음, 갑자기 통신이 두절되고 말았다. 그를 아들처럼 좋아하시던 엄마가 혹시 장래의 사윗감이라도 될까봐 지레 겁을 먹고 우리의 편지를 모두 압수해서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의 실망과 분노와 안타까움은 나를 몹시도 아프게 했지만, 그 아픔은 또한 나를 훌쩍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시간은 가서 몇 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와의 아픔은 세월의 마술 앞에서 점점 무디어 갔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그의 끈질긴 사랑 앞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 남자와 오랜 기간 사귀다가 결혼을 몇 달 앞둔 어느 겨울이었다. 몰라볼 만큼 어른이 되어버린 그가 우리 집으로 찾아 온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꿈꾸어오던 결심이라며 나에게 청혼을 하는 거였다. 그 동안 내 앞에 나서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을 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너무 늦어버린 현실 앞에서 그는 울먹이고 돌아서며 진심으로 나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나도 그가 착하고 예쁜 신부를 만나 그동안의 아픈 상처를 치유 받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삼십 여 년이 지나 지금은 반백이 되었을 고독한 나그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내가 행복하기를 빌어 주고 있을 것 같다.

 

                                                                                                                                                    200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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