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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7.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내일이면 드디어 아들이 혼례식을 올리게 된다. 며느리가 될 아이 집에서 택일(擇日)을 하여 보낸 후 초조하게 기다린 몇 달이 지나고, 그날이 바로 내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아들은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맹세하고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항상 철부지 같던 아들이 어느덧 자라서 제 가정을 꾸린다고 생각하니,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이제 아들은 부모 품을 떠나 제 둥지를 만들고, 가족을 거느릴 가장이라는 책임을 평생 지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아들의 짐을 이것저것 정리하다가 오래된 사진첩을 꺼냈다. 거기에는 아들이 처음 세상의 빛을 보던 날, 새빨간 얼굴로 울음보를 터트리는 모습에서부터 통통하게 살이 오르며 목욕을 하는 장면, 엄마 젖을 빠는 모습 등이 육아 일기와 함께 실려 있었다. 우리 부부에게 처음으로 경이와 신비로움으로 다가와 부모가 되는 기쁨을 안겨주던 모습들이었다.

 

  그 다음에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며 벌인 돌잔치의 정경과, 개구쟁이가 성장하는 모습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을 뛰어 넘은 듯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게 아이는 천진하고 귀여웠다. 방을 치우던 일도 잊어버리고 마냥 사진첩에 빠져서 추억에 젖어 있다가 나는 그만 심장이 멈춰지듯 흠칫 놀라고 말았다.

 

  거기에는 너무 놀라고 가슴 아픈 사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가을. 아들은 안대를 하고 누워서 울고 있었다. 멜빵바지의 어깨 끈은 모두 풀어져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추석날 아파서 아무 곳도 못 가는 아이를 달래려고 장난삼아 찍어둔 사진 같았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이 사진이 그 동안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 나와서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일까.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때의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져오며 가슴이 아파 왔다. 아들은 한창 귀엽던 여섯 살 때, 장미 가시에 찔려 한쪽 눈을 잃었다. 옆 집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사소한 다툼 끝에 꽃밭에 넘어졌는데, 그만 장미 가시에 눈을 스친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 같던 상처에 장미의 독이 퍼지고 염증이 진행되면서 아이는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진통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조그만 아이가 “엄마 눈이 너무 너무 아파요. 제발 주사 좀 놔주세요.”라고 울부짖을 만큼 통증이 지독했다. 그런 고통을 보름동안이나 지켜보면서도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아이와 같이 몸부림쳤다. 결국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수술을 받던 날. 아이와 더불어 내 인생도 평생 먹구름이 끼고 영영 햇빛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자책감에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그리고 무성한 소문에 시달리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세상과 담을 쌓고 칩거했던 몇 년 동안은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그때 나를 고통에서 구원해준 계기가 생겼다. 여성동아에서 “쓰고 싶은 이야기”라는 수기 모집이 있었고, 골방에 틀어박혀 사흘 밤을 꼬박 지새우며 원고지 100장을 쓰면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글을 쓰면서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울었고, 그 눈물 속에 모든 미움과 원망을 녹여내며 참회를 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고 나자, 나를 묶고 있던 아집과 속박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가 있었다. 또한 고통을 회피 하려하지 않고 직시하면서 모든 체면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나는 너에게 낙엽이 되리”라는 그 글이 운 좋게 당선이 되고 세상에 알려지면서 나는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혼자 황량한 벌판에 서 있던 내가 세상에 손을 내밀자 많은 사람들이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다시 세상과 화해하면서 나는 조금씩 성숙해졌다. 그 일이 계기가 되면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제 문단의 말석(末席)에서나마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많은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얼마나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부모의 지나친 염려 때문에 혹시 나약한 아이로 자라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했으며. 사춘기를 겪으며 아이가 방황할 때는 자신을 비관하고 잘못되는 건 아닐까 마음을 졸였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일부러 초연(超然)해 지려고 애썼고, 자립심을 키워 주려고 노력했다.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다행히 아들은 바르고 씩씩하게 커 주었다. 그리고 예쁜 아가씨를 만나 칠 년 동안 사랑을 키워 온 것이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오래 다져온 사랑이 부부로 결실을 맺고 더 큰사랑으로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어쩌면 부부라는 인생의 여정은 아들이 지금까지 겪은 고통보다도 더 힘들고 긴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

 

  “아들아! 이제 너는 부모의 품을 떠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너를 사랑했듯이 너도 네 아내를 믿고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가기 바란다. 네 머리맡에 항상 붙여 놓았던 기도문, 깨끗한 마음 높은 목표로서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알며 위대함은 소박한 것에 있고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도록 하렴.”

 

  이제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아들과 며느리가 평안(平安)에 안주하지만 말고 부디 고통에도 극복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20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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