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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찔레꽃 향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7.

찔레꽃 향기

 

 

  뒷산을 오르자니 어디선가 찔레꽃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어느 숲속에 숨어 있어 눈에 확 뜨이지는 않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초록으로 엉켜있는 풀숲에 하얀 찔레꽃이 수줍은 듯 피어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떠나온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꽃. 그 꽃은 우리에게 많은 향기를 남기고 간 친구를 닮은 꽃이었다.

 

  친구는 마치 새댁처럼 수줍게 배시시 웃고 있었다. 언제 저런 시절이 있었는가 싶게 앳되어 보이고 청초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 아래로는 예쁜 꽃바구니가 놓여있었는데, 하얀 찔레에 여러 가지 꽃을 섞어서 만든 화사한 꽃바구니였다. 마치 생일 축하라도 하듯 활짝 피어있는 꽃바구니가 이방인처럼 튀어 보였다. 그 밑에 보낸 사람의 이름이 없었다면 아마도 잘못 배달된 것으로 알만큼 그곳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꽃이었다.

 

  평소에 친구가 좋아하던 꽃으로 바구니를 만들었다는 변명이 아니더라도 굳이 형식에만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양옆에 줄줄이 늘어선 흰 국화나, 근조(謹弔)라는 팻말을 부친 노란 꽃 화환이 아니면 어떠랴. 사람의 삶이 관습이나 정해진 형식에만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친구는 영정 속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나와 덥석 손을 잡을 것만 같았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끊어질듯 이어지며 구성지게 퍼져나갔다. 검은 상복을 입은 친구의 남편과 아이들이 그래도 의연하게 손님을 맞느라 분주하다. 지금은 아마도 갑자기 당한 일에 제대로 실감을 할 수가 없으리라.

 

  우리는 종일 영안실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지난 추억담을 이야기를 하거나, 친구 생각을 하며 훌쩍거리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산사람은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면서 그렇게 의식(意識)을 차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친구를 잃은 슬픔에 목 놓아 울기도 하였는데, 어쩌면 떠난 사람보다는 자기 설움에 겨워 구슬피 우는 지도 몰랐다.

 

  봄 가뭄이 계속되어 대지는 타들어 가고 농작물이나 가로수까지 축 늘어져 비를 기다리던 따분한 초여름 날이었다. 한 친구한테서 “예순이가 중환자실에 있다.”고 연락이 왔다. 이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평소에 건강할 뿐 아니라, 며칠 전에도 친구들 모임이 있어 만났었는데... 믿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초췌해진 친구의 남편이 앉아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상황 설명을 들으니, 저녁을 먹은 후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쓰러져서 병원에 옮긴 후 뇌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의식도 회복되어 한숨을 돌리고 있던 차에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잠깐 면회 시간을 틈타 중환자 실로 들어가니 친구는 몰라보리만큼 얼굴이 퉁퉁 부어있고 의식을 어디에 놓고 있는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사투(死鬪)를 벌리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 숨 쉬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은 얼마쯤이나 될까? 전설의 고향에서 본 것처럼 강을 건너고 구름 속을 지나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라면, 제발 그 길에서 추락하거나 명부(冥府)에서 빠져 나와 이승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빌었다.

 

  친구는 유난히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부 금실도 너무 좋아 친구들의 눈총을 받을 정도였으며, 더구나 아이들에 대한 애정도 유별나서 가끔은 마음에 상처를 받곤 했다. 맏며느리로서 까다로운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긴 했지만, 의사 말처럼 스트레스를 받아서 뇌출혈이 될 만한 이유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친구가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건강한 사람들이 할 일이란 너무도 미미한 일들뿐이었다. 그저 중환자 대기실에 앉아 환자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가, 전지전능한 신에게 혹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기도를 하는 일뿐이었다. 의사의 한마디에 따라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다가는 또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기도 했다.

 

  주위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친구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해도 눈이라도 한번 뜨고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작별의 인사라도 하고 가기만을 빌었다. 그러나 결국 친구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나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남기고 어떻게 생명줄을 놓아 버렸을까. 친구를 저 세상으로 보내 놓고 나는 여러 날을 앓았다. 혈압이 계속 오르면서 매사에 의욕이 없고 사는 것이 너무도 허망하였다.

 

  그동안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늙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친구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비슷한 동류(同類) 의식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IMF가 오고 비슷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같이 이사를 오면서 우리는 서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상처를 위로하곤 하였다. 나에게 부디 용기를 잃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늘 명랑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날씨가 점점 초여름으로 치달으면서 화려하던 장미꽃도 시들기 시작했다. 오후쯤 쉬엄쉬엄 집 뒤에 있는 산을 오르려니 어디선가 찔레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발목을 붙잡는다. 꽃향기를 맡고 있자니 장사익이란 가수가 부른 “찔레꽃”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새워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끊어질 듯 흐느끼며 애절하게 이어지는 찔레꽃이란 노래를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친구여! 이제는 이승의 집착과 미련을 모두 버리고 저 세상에서 편히 영면하시게.

 

                                                                                                                                                             200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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