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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나를 위로해준 말없는 친구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7.

나를 위로 해준 말없는 친구

 

                                                                                                                                                                              

  올해는 추위마저 이른 것 같다. 가을이 아직 끝자락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벌써 겨울이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기는 입동이 코앞에 있으니 추울 때도 되었지만, 갑자기 닥친 추위 때문인지 가슴까지 시려오는 느낌이다. 점퍼 깃을 올리며 숲 속으로 들어가는 오솔길로 들어선다.

 

  물기가 걷힌 나뭇잎들이 낙엽이 되어 솔잎과 함께 땅 위를 덮고 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촉감과 솔잎의 폭신한 느낌이 금방 발끝으로 전해져 온다. 인적이 드문 이 오솔길을 처음 발견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 가까워 온다.

 

  작년 가을 우리 가족은 견디기 힘든 큰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 오래 근무하던 직장에서 퇴직을 당한 것이다. 그런 일이야 우리만 겪은 것이 아니고 IMF를 맞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을 당하여 거리로 몰려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믿고 보증을 해준 후배가 부도를 내고 파산을 하는 바람에 모든 책임을 남편이 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 그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오는 것. 믿기 지 않던 일들이 현실로 돌아와 우리를 옥죄기 시작했다. 평소에 신망(信望)과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던 남편은 모든 손실을 자기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십년 넘게 살던 집을 팔고 그 동안 알뜰살뜰 모았던 저축금과 남편의 퇴직금까지 합쳐 손실금을 충당하고 나니 그야말로 우리는 빈 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그 동안 별 욕심 없이 남에게 못할 짓 안하고 살아왔는데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사는 게 너무 허탈했다. 남편과 결혼하여 삼십 여 년 동안 알뜰하게 살아온 세월들이 모두 물거품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더구나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 의논이나 내색도 없었던 남편에게 배신감을 삭히기가 무척 힘들었다. 부부란 무엇일까? 라는 회의에 발목이 잡혀 세상살이가 더 허망하기만 하였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하자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결혼을 한 후에는 남편이 가져다주는 월급으로 살림이나 하던 오십대 여자에게 현실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주위에 친구들이나 친지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걷고 있는데 나만 깊이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다가올 내일이 걱정되고 두려웠다. 앞으로 살아갈 일도 막막하고 외로움도 견디기 힘들었다. 여태까지 살아 왔던 생활 습관은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며칠 동안 울기도 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낮 밤을 가리지 않고 걸어 다니기도 했다.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던 미로(迷路) 속에서 가느다란 빛이 보이기 시작한 건 이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서였다. 겨울이 되자 우리는 다행이 이곳 광교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하여 이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동네에서 어떻게 마음을 붙이고 삶의 뿌리를 내릴까 생각하니 외롭고 두렵기만 하였다.

 

  그때 내 곁에 와준 것이 컴퓨터였다. 동네에서 무료 교육을 해준다기에 오래 망설이다 등록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교육장에 가보니 전부 젊은 주부들이었다. 나이 탓인지 처음에는 설명을 들어도 도대체 뭐가 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어 부끄러움이 줄어드니, 모르는 것은 주저하지 않고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집에 와서 복습을 하였다.

 

  기본 과정을 끝내고 나니 그렇게 겁나기만 하던 컴퓨터가 조금씩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 후로 나는 틈만 나면 컴퓨터를 가까이 하게 되었다. 아무런 삶의 의욕도 없던 나에게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맨 처음 컴퓨터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 것은 외국에 나가 있는 아들과 이 메일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었다. 서신으로 주고받을 때는 거의 한 달이 걸리던 것을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물을 수 있으니 너무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검색 사이트로 들어가 모르던 것을 알아내는 기쁨은 내 일상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용기만 잃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아준 계기가 되었다. 전에는 아이들한테 구박을 받으면서도 감히 배워볼 엄두를 내지 못하던 컴퓨터가 아니던가. 아니 나하고는 상관없는 먼 존재처럼 생각되던 컴퓨터가 이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과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직 나에게도 남은 것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그 동안 내가 잃은 것만 안타까워했지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남았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나보다 더 가난하고 힘든 이웃이 많다는 것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런 인식에 눈이 떠지자 나의 생활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저 잃은 것의 집착에만 시달리던 일도 많이 줄어들었고, 괴롭기만 하던 마음도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컴퓨터 뿐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것에도 도전 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이 생겼다.

 

  어느덧 노루 꼬리만큼 짧아진 햇살이 벌써 산자락에 어둠을 몰고 온다. 바람이 한바탕 불어오더니 그나마 남아 있던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은 나무와 영원한 별리(別離)가 아니다. 그 나뭇잎들은 나무 밑에서 구르다가 썩어 나무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1999. 11(에듀텍 주최 컴퓨터 수강기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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