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희망을 안고 오릅니다.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5.

희망을 안고 오릅니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고 긴 것 같다. 아직도 한낮에는 곡식과 과일을 여물게 하려고 햇볕이 따갑지만 얼마 안 있으면 더위도 수그러들고 물기가 걷히면서 나뭇잎들은 싱싱함을 잃을 것이다. 오후 늦게 한낮의 열기를 피해 산으로 오르는 숲 속으로 발길을 옮긴다. 어젯밤 내린 비로 숲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솔향기와 흙냄새가 한꺼번에 몰려든다. 산 속으로 들어서자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에 묻혀 멀리 잦아드는 듯싶다. 풀벌레들은 왜 저렇게 안간힘을 쓰며 지치도록 우는 것일까.

 

  어떤 사람의 말처럼 “매미는 7 일 동안 살기 위해서 7 년을 기다린 것이 너무 억울하여 계속 울어댄다.”고 했는데 정말 저런 미물들도 가슴속에 맺힌 한(恨)이 많아서 저렇게 종일토록 우는 것일까. 작년에 이곳 산 아래로 이사 와서 매일 오르던 산길인데도 오늘은 땀이 비 오듯이 흐르며 숨이 턱에까지 찬다. 통나무를 잘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간이 의자에 앉아 잠시 땀을 식힌다. 이 능선을 따라 두어 시간쯤 오르면 광교산 정상이 나오는데 보통은 반 정도만 갔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재작년 가을 우리 가족은 견디기 힘든 큰 고통을 겪었다. 우선 그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야 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를 버티었다. 더구나 자괴감(自塊感)과 허탈감에 빠진 남편이 행여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슬픔을 느낄 여유마저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미움들이 슬그머니 되살아났다.

 

  평범한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잃은 것에 대한 집착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허탈하고 억울하였고 사는 것 마저 시들하여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동네로 이사를 와서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은 우리 집 뒤로 소나무가 울창한 이 산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 부부는 거의 매일 산에 오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동안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반성했으며, 힘들지만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노력했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과거의 집착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을 살려고 애썼다.

 

  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우리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그 자리에 묵묵히 서있는 산은 아무 것도 요구하는 법이 없이 모든 걸 품어 주고 있었다. 산에 오르며 용서와 화해를 배우고 겸손을 배우며 마음의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 갔다. 자연은 정말 신기하리만치 상처를 치유해주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여름이 지나고 나면 나뭇잎들은 시들어가고 숲은 생기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한여름 내내 햇볕과 자양분을 빨아올린 나무들은 열매와 씨앗을 만들고, 새들과 곤충들은 겨우살이 준비를 하느라 바쁠 것이다. 나는 천천히 통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산을 오른다.

 

  누군가 예쁜 종이에 “우리는 희망을 안고 산에 오릅니다.”라는 글귀를 써서 나무에 걸어 놓았다. 그 사람도 힘든 시련을 겪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일까. 희망,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이었다. 아니 잊고 있던 말이기도 했다. 누군가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으면 살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디선가 다람쥐 한 마리가 나와서 눈치를 보다가 인기척에 나무위로 달아나 버린다. 잠시 후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는지 다시 쪼르르 내려와 무엇인가를 물고 간다. 다람쥐가 물고 간 것이 생명에 꼭 필요한 양식이라면 오늘 내가 안고 가는 희망도 내 영혼에 꼭 필요한 생명의 양식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2000, 8

'나의 글모음 > 수필집(불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위로해준 말없는 친구   (0) 2009.07.17
창 가에서  (0) 2009.07.15
다림질  (2) 2009.07.15
만남의 인연  (0) 2009.07.15
나목의 의미  (0) 2009.07.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