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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나목의 의미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5.

나목(裸木)의 의미

 

                                                                                                                                                      한 향 순

 

  그곳으로 가는 길은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나무들과 그것을 품은 설산(雪山)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표지판을 따라 꼬불꼬불한 고개를 넘다보니, 동양화 같은 산자락에 포근히 안긴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사방은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져 있고 아늑한 분지 같은 곳에 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주위의 산들이 버팀목처럼 막아주어서일까 그곳에는 바람 한 점 없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맏동서인 형님이 이곳 요양병원에 와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안내를 자청하고 나섰다. 게다가 우리의 동행에 길동무가 되어준다고 손아래 동서까지 합류를 해서 세 동서가 모처럼 먼 길을 나선 것이다. 형님이 건강했다면 정말 기분 좋고 즐거운 나들이였을 것이다. 나보다 몇 달 앞서 결혼한 큰동서는 나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형님과 나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였고, 닮은꼴로 남매를 낳아 기르며 한 집안의 며느리들로 별 탈 없이 살아왔다. 젊은 시절에는 원래 약골인데다 직장생활을 하는 형님 때문에 불만도 많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늘 동동거리며 힘겹게 사는 그녀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형님은 이제 30년을 넘게 근속하던 교직을 퇴직하고 편안한 생활을 즐길만한 시기였는데, 재작년 가을 갑자기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다행이 수술도 잘되고 항암치료도 열심히 받아 식구들도 한숨을 돌렸지만 늘 불안하다며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이곳 요양병원을 알아내고 답사하는 의미로 찾아오게 된 것이다. 약도를 들고 초행길을 달리다보니 이런 첩첩산중에 어떻게 건물이 들어섰을까 싶도록 주변 경치가 기막히게 아름다웠다. 또한 고갯길에 붙여 놓은 현수막의 내용처럼 좋은 물과 좋은 공기, 그리고 신선한 음식을 먹으며 밝은 햇볕만 쬐고 있어도 저절로 건강해질 것 같았다.

 

  우리는 우선 상담실로 들어가 병원 관계자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의 안내를 따라 병원을 돌아보았다. 요양원에는 간혹 치매나 중풍을 앓는 노인 환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말기 암 환자들이었다. 이곳에서는 “뉴 스타트”운동 같은 전인치료 뿐만 아니라 웃음치료나 심리치료 등으로 우선 환자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치료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현대병들이 그렇겠지만 암도 오염된 공기와 음식, 극도로 긴장된 스트레스 때문에 면역력이 저하되어 발병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약물요법이나 식이요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적인 치료방법이라고 여겨졌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도 식당으로 가서 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어 보기로 했다. 식단은 잡곡밥에 주로 야채위주의 뷔페식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환자복을 입은 환우들이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오랫동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당 벽면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꼭꼭 씹어 천천히 먹읍시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말을 명심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 같았다.

 

  우리 옆 테이블에도 너덧 명의 여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밝은 얼굴과 환한 모습들이 전혀 환자답지 않았다. 오십대쯤 되었을까. 얼굴이 뽀얗고 후덕하게 생긴 여인에게 “왜 이곳에 오게 되셨어요?”라고 물으니 가족들이 수소문하여 적극 추천을 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자궁암이 재발하여 병원에서도 포기를 한 상태이며 의학적으로는 아무 치료 방법이 없다고 했다.

 

  뽀얀 피부의 얼굴이며 맑은 표정까지도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다고 했더니, 그러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웃음 뒤에는 인생을 달관(達觀)한 사람 같은 표정이 엿보였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여인처럼 마지막 생(生)의 끈을 붙잡고 죽음과 사투(死鬪)를 벌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의 처지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서인지 표정은 밝고 평온해 보였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하얀 눈이 발목까지 차오르는 비스듬한 산책길을 걸었다. 올 겨울은 눈이 귀해서 눈길을 밟아 보는 것만도 행운이라 생각하며 걷는데 예쁜 산새 한 마리가 놀라서 날아오른다. 형님은 “어머나! 어쩌면 무슨 새가 저리도 예쁠까.”라고 감탄을 하며 한참동안 눈길을 떼지 못한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을 산새 한 마리에도 경탄을 금치 못하고 애착을 갖는 형님을 보니 가슴이 아프게 저려왔다.

 

  아직은 쌀쌀하고 추운 날씨인데도 햇살이 퍼지니 산책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온다. 여럿이 모여서 가는 이들도 있고, 혼자서 묵묵히 걷는 사람도 많다.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열심히 걷는 것일까. 병마를 이기고 다시 집으로 가게 해달라고 빌고 있을까. 아니면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는 것일까.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그 시기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누구나 죽게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기에 아등바등하고 욕심을 부리며 사나 보다. 그러기에 잘 사는 것 못지않게 잘 죽는 것도 우리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이 요양원은 치료의 목적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지 몰랐다.

 

  정말 아무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비우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부단한 노력과 깨달음을 통해 얻을 수도 있는 맑은 경지라 생각한다.

 

  우리는 거친 바람을 이기고 꿋꿋이 서있는 나무들을 보며, 자기의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내어주다가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는 나목(裸木)의 의미를 되새기며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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