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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익숙한 몸짓들과 이별을 고하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5.

익숙한 몸짓들과 이별을 고하며

 

  아침에 눈을 뜨면 혹시나 하며 이불을 젖히고 다리부터 살핀다. 예전처럼 벌떡 일어나던 건강한 다리이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그러나 여전히 오른쪽 무릎은 산모의 얼굴처럼 퉁퉁 부어 있고, 침과 부항을 뜬 자리가 푸르죽죽하게 멍으로 남아 마치 무언의 데모를 하고 있는 듯했다.

 

  하기는 60여 년이 가깝게 무던히도 부려먹은 다리였다. 해마다 점점 늘어가는 체중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견뎌오지 않았던가. 처음 병원에서 절대 안정을 취하고 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엄포를 놓을 때도 “그래 그동안 내 다리도 너무 힘들었을 테니 이제 좀 쉬게 해주어야지”라고 느긋하게 생각했다. 그저 답답한 일상을 어떻게 잘 견디며 소일할 것인가 하는 것만이 관심사였다.

 

  그래서 보고 싶었던 책도 몇 권 사오고 비디오테이프도 몇 개 빌려놓고서 모처럼 찾아온 휴식을 나름대로 즐겨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깁스를 하거나 입원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주부의 역할이 멀건이 앉아서 편히 쉴 수만은 없었다. 하다못해 식구들의 먹을거리라도 장만해야하고 병원에도 다녀야 하니 다리를 안 쓸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온 민족의 설날이 다가왔고 부은 다리를 질질 끌고 가서 며느리 역할도 해야 했다.

 

  그때부터 무릎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계속 치료를 하는데도 낫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듯한 상황이 되자 겁이 더럭 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나와 비슷한 증상들을 찾아내고 투병일지를 읽고 나니, 그냥 얼마동안 쉬면 괜찮을 거라고 애초에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가벼운 병세가 아니었다.

 

  그동안 퇴행성관절염이 서서히 진행되었는데도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계속 격렬한 운동을 해온 것이다. 다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신호를 보냈을 텐데 머리는 마냥 젊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외면을 했었다. 불안해지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대학병원으로 한의원으로 좋다는 곳은 여기저기 모두 찾아 다녔다.

 

  정형외과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엄지손가락만한 굵기의 주사기로 노란 액체를 한 대접씩 빼내고 한의원에서는 한약과 침으로 물을 말린다고 하는데도 무릎은 계속 부어올랐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스며드는지 그것은 샘물처럼 부지불식간에 몸 안에 고였고, 몸 주인에 대한 원망인지 저항인지 반란은 좀처럼 기세를 꺾지 않았다.

 

  드디어 무릎과의 장기전을 예감하고 전의(戰意)를 잃지 않으려면 마음부터 추스르고 다져 먹어야 했다. 그동안 생활의 일부처럼 해오던 운동들도 모두 접고, 무료한 생활에 활력을 주던 취미들도 이제는 모두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설사 다리가 낫는다 해도 이제는 조심조심 걷는 것 이외에 운동은 힘들 것이라는 주위의 충고에 투병도 하기 전에 미리 주눅부터 들었다.

 

  몇 십 년 동안 아침마다 해오던 에어로빅이나 근래에 막 재미를 붙여 시합까지 나갔던 스포츠 댄스. 바람을 가르며 탄천을 거쳐 한강까지 오르내리던 자전거 타기 등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하물며 하얀 설원을 질주하던 스키나, 내년에는 꼭 한번 지리산 종주에 도전하리라던 등산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낙담이 지나쳐 맥이 빠지며 나중에는 우울 증세까지 보였다.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무릎이 이지경이 되도록 왜 한 번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라는 후회와 회한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몇 년 전에 겨울산행을 하다 넘어져 무릎 인대를 다친 적이 있었는데, 그곳이 가끔 말썽을 부리고 아프긴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치명적인 관절염이 되리라곤 정말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나이를 망각하고 너무 설치다가 이런 변을 당했다고 당연하다는 투로 나무라기도 했다. 하긴 분수를 모르고 마냥 젊다고 생각하고 몸을 혹사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또한 그동안 나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체력을 늘린다고 분에 넘치는 만용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니, 어리석은 인간은 항상 나쁜 결과 뒤에나 후회하고 깨달아 가는가보다.

어쩌면 건강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시행착오의 연속인지 모른다. 자기가 지니고 있을 때에는 별로 소중한 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정작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알고 후회하게 되니 말이다. 아직 편안하게 걷게 될 때 까지는 얼마나 먼 투병의 길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젠 너무 서두르지도 않을 것이며 초조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내 삶에 기쁨과 활력을 주었던 익숙한 몸짓들과는 이별을 고하고 노년으로 가는 새로운 일상에 정을 붙여야겠다.

 

                                                                                                                                                    200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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