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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생명의 노래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5.

생명의 노래

한 향 순

 

  우편함에 묵직하게 꽂혀있는 책을 발견했다. 정기구독을 하는 잡지이거나, 책을 낸 문우들의 증정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꺼내보니 낯익은 친구의 필체가 반갑다. 포장을 뜯으니 깨알처럼 쓴 정겨운 글이 나온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게 덧없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덧없군요. 우리들의 부모가 저렇게 아파하며 죽어가듯, 우리 또한 그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을....”라는 글로 시작되는 친구의 편지였다.

 

  내 생일에는 25년이 넘게 책을 선물해주는 친구가 있다. 긴 세월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내 생일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고맙고 알뜰한 친구이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정겹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친구와의 인연은 삼십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책을 읽을 시간이나 여유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그나마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은 남편이 사다주는 여성잡지 정도였다. 그 책에서 어떤 독자의 글을 자주 접하게 되었는데, 공감이 가는 글이라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글을 쓴 사람이 우리 아이와 같은 유치원의 학부모라는 것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자연스레 가까워지게 되었다. 전업주부인 나와는 달리 그녀는 직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쁜 중에 살림도 알뜰하게 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책도 많이 읽었다. 나는 슈퍼우먼처럼 부지런한 그녀를 가까이 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구나 직장과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꾸준히 책을 읽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나의 나태한 생활 태도를 각성하기도 했다.

 

  우리는 가끔 만나서 서로의 글을 보고 느낀 감정을 이야기 하곤 했는데, 나는 그녀를 흉내 내느라 글을 써서 여기저기 잡지에 투고를 하곤 했다. 우리가 친해지자 나중에는 남편들까지 가까워져서 두 집 식구들이 같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함께 가는 좋은 친구이자 이웃사촌이 되었다. 친구는 여러 종류의 책이 많아서 그녀가 없을 때도 나는 그 집에 들려 보고 싶던 책을 빌려오거나 새로 나온 서적들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살림에 묻혀 무디어진 감성을 조금씩 닦으며 습작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크자 우리는 각자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여 자주 만날 수 없었는데도 꾸준히 우정을 키워왔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사이가 되었다. 요즘 친구는 삼십여 년 간 아이들을 키워주고 살림을 돌봐주시던 친정어머니가 죽음의 문턱을 바라보는 힘든 상황이고, 나 또한 병환으로 누워계신 어머니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젊은 시절에 만나 문학을 논(論)하고 꿈을 이야기하던 우리는 어느덧 초로(初老)의 길목에서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친구가 보내온 책도 “나의 생명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생명과 연관된 일을 하는 두 과학자와 예술가 한 사람이 같이 만든 책이었다. 세 친구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동갑내기로 모두 영역은 다르지만 “생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공통점은 자연적인 환경에서 낳고 자랐는데, 유년 시절에 꽃과 풀과 작은 생명체들을 보고 만지며 성장한 사람들이기에 생명의 소중함을 일찌감치 체험했을지도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은 걸핏하면 조그만 좌절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인터넷에 자살 사이트가 성행하는 것을 보면 소중한 생명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병원에 가서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의 투병하는 모습이나 애타는 소원을 들어보면 생각이 많이 바뀔 것이다. 그들이 조금 더 살기 위해서 병마와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하는지 직접 보고 느낀다면 아마도 조금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지 않을까 한다.

 

  친구가 꺼져가는 불씨처럼 잦아드는 어머니의 생명을 보며 속수무책으로 아파하는 것도, 아무것도 어머니를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덜 슬프고 조금 덜 아프고, 그래서 이 세상이 좀 더 희망적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당신의 책상 한 모퉁이에서 끊임없이 생명의 노래를 불러 준다면 좋겠습니다.”라고 편지는 끝을 맺고 있었다.

 

  언젠가 원주의 토지 문학관에 가서 박경리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어느 생명이든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다운 축복이라고 하셨다. 더구나 살아서 능동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한 행복이라고 했다. “누구나 어렵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나비의 끊임없는 날개 짓을 보고 인간은 ‘나비가 춤을 춘다.’라고 표현하지만 나비 자체는 생존을 위해 힘쓰고 있는 모습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갖추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도 나름대로는 이를 악물고 힘겹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이런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기에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한다. 사소한 일에도 죽고 싶다고 푸념을 하거나 조그만 고통도 두려워하며 외면하려고 한다. 살아 있는 것만도 축복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을 때, 우리는 겸손하게 삶을 받아들이며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더불어 선물을 보내준 친구가 힘든 고비를 잘 넘기고 다시 환한 웃음을 웃으며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0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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