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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만남의 인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5.

만남의 인연

한 향 순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어떤 연예인이 어린 시절의 은사님을 찾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찡해왔다. 그 프로는 유명한 연예인이나 성공한 스타들이 어릴 적에 짝사랑하던 동창이나 보고 싶은 친구를 찾아내어 재회하는 흥미위주의 프로였다. 그러나 그 날의 주인공은 힘들고 어렵던 학생시절,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신 선생님을 어렵사리 찾아 그동안의 은혜에 감사하며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또한 갖가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더러는 부부의 인연처럼 피할 수 없는 필연(必然)도 있지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악연(惡緣)의 만남도 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만 가슴에 큰 울림을 주는 사람도 있고, 우연한 계기에 자기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남도 있다.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도 잊혀 지지 않는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는데, 첫 번째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B선생님이시다. 어린 시절 나는 무척이나 내성적이고 소심한 편이었다. 맏이여서 그랬는지 나의 생각이나 주장을 말하기보다는 대체로 남의 의견을 따라가는 조금은 줏대 없고 겁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학업 성적도 중간 정도였고, 특별히 잘하거나 못하는 것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평범한 존재였다. 하물며 같은 반 아이들조차 나를 모르는 아이가 있을 정도로 말이 없고 늘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수학 경시대회에 나갈 학생을 뽑기 위해 예비 시험을 치렀는데 의외로 나의 성적이 제일 우수하게 나왔다. 나는 믿어지지 않았고 무언가 채점이 잘못된 듯싶어 선생님을 찾아갔다. 나는 실력이 모자라니 도저히 학교 대표로 경시대회에 나갈 수가 없으며, 시험 성적도 그저 우연히 잘 나왔을 뿐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다정하게 웃으시더니 “너무 겁내지 말고 평소 실력대로만 하면 된다.”고 하시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그 날부터 나는 걱정이 되어 죽을힘을 다하여 공부를 했다. 행여 낙제점을 받아 학교 망신이라도 시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입맛을 잃을 정도였다. 다행이 시험 성적은 그럭저럭 나와 망신은 면했고 그 후부터 나는 조금씩 공부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관심과 사랑으로 대해주시는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졸업을 할 즈음에는 내가 사는 도시에서 제일 우수한 여자 중학교를 무시험으로 갈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B선생님은 처음으로 어린 나를 인정해주고 믿어주신 분이었다. 이 세상에 자신을 믿고 인정해 주는 것만큼 더 큰 격려가 있을까. 그때부터 나도 열심히 하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며 성격도 차츰 명랑하고 밝아지기 시작했다. 자기의 존재를 소중히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 후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 사춘기의 열병도 별 탈 없이 넘기며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선생님을 잊어갔다.

 

  그리고 또 한 분, 잊을 수 없는 L선생님은 내가 나이 사십 중반에 들어서서 만난 스승이다. 젊을 때부터 연모하던 문학에의 꿈을 접은 채 생활에 쫓겨 살아가다가 어느 정도 아이들도 크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글을 쓰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다가 제대로 된 글을 써보고 싶어 수필공부를 시작했는데, 바로 L선생님께 지도를 받게 된 것이다.

 

  선생님은 날카로운 지성과 따뜻한 감성을 공유하신 분이셨다. 수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나 직접 보고들은 체험에다, 자기의 생각과 철학을 접목시켜 표현하는 문학이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글은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글을 읽다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인생관, 그리고 글을 쓴 사람의 사상(思想)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좋은 글을 쓰려면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인품을 닦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는 글을 쓰는 이론 공부보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인생 공부를 더 많이 했는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나 위주로 생각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이 트일 수 있었던 것은 수필공부 외에 선생님께 배운 또 다른 수확이었다. 처음에는 엄격한 수업 방식 때문에 좌절도 많이 했지만 L선생님 덕분에 수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수필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수필 공부를 하면서 좋은 선후배와 문우들과도 많은 인연을 만들었다.

 

  온갖 꽃들이 앞 다투어 피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 내 인생의 초년에 나에게 사랑으로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신 B선생님과, 무력해진 중년의 나에게 수필이라는 새로운 선물과 의욕을 주신 L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많은 것을 사랑하며 열심히 사는 일이리라. 두 분 선생님도 이 눈부시고 화창한 봄날에 부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도드린다.

 

                                                                                                                                                          200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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