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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다림질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5.

다 림 질

 

한 향 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다림질을 한다. 바람 한 점 없이 후덥지근한 날씨에 다리미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로 등허리는 땀으로 흥건하다. 기승을 부리는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해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산과 바다를 찾아 연일 도시를 빠져 나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나도 마음이 부풀어 휴가계획을 세우고 피서 대열에 끼어 들떠 있겠지만, 올해는 텔레비전에 비친 피서 인파를 보면서도 나와는 상관없는 먼 세상 이야기같이 느껴졌다. 어딜 가나 덥지 않은 곳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가뭄 때문에 애타하는 농민들과 식수난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숨 막히는 교통체증과 그 복잡한 인파 속에 끼어들 엄두가 나질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더위를 잊어보려고 시원한 파도 소리가 들리는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책을 읽으려고 이것저것 펴보기도 했지만 더위 때문인지 도저히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그러다가 궁리를 해낸 것이 우리 조상들의 지혜인 이열치열이라고 다림질을 하기 시작했다.

 

  매일 갈아입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비롯하여, 티셔츠나 청바지까지도 다려서 입는 아들의 버릇 때문에 우리 집은 유난히 다림질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날씨가 덥다고 며칠을 미뤄왔더니 다림질할 옷이 수북이 쌓인 것이다. 그 많은 옷들을 꺼내 놓고 하나하나 다림질을 하는 동안 팔은 아프고,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어 후끈거렸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잘 다려진 옷가지처럼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갔다.

 

  이십여 년 전 내가 결혼하던 해, 어머니는 장롱 속에 깊이 넣어 두었던 작은 고리짝을 꺼내주셨다. 그 속에는 맏딸이 시집가면 주려고 오랜 세월 모아 놓은 여러 가지 물건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언제 그렇게 장만하셨는지 물빛 고운 한복감이며, 모양이 귀여운 찻잔과 숟가락, 속옷이나 손수건까지 어머니가 귀하고 예쁘다고 생각하신 것은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두신 것이었다.

 

  그 중에 그 당시에는 구하기 어려웠던 미국 “제네럴 모터스” 회사의 다리미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머니의 그런 마음 씀이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서 마땅히 준비한 것으로 여겨져서 아무런 감동도 없었다. 그리고 으레 예쁘고 귀한 것은 내가 가져가도 된다고 생각하며 결혼을 했다.

 

  신혼 초에 매일 남편의 와이셔츠와 바지를 다려야 하는데 생각처럼 잘 다려지지가 않았다. 이쪽을 다리고 나면 저쪽이 구겨지고, 바지의 앞 주름을 맞추어 다리고 나면 뒤쪽에는 선이 두 개나 생기곤 했다. 그러면 옆에서 보기가 딱했던지 남편이 다리미를 빼앗아 군대에서 배운 솜씨라며 보기 좋게 날을 세워 손수 다려 입곤 하였다.

 

  그 당시에는 투박하고 튼튼하게 생긴 다리미가 왜 그렇게 무겁기만 하던지 별로 좋은 줄을 몰랐다. 힘들여서 몇 가지의 옷을 다리고 나면 팔이 아프고 손목이 시큰거려서 다림질하는 일이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그 후, 이십 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살림 솜씨뿐 아니라 다림질에도 기술이 늘어 그 무겁던 다리미를 마음대로 움직여가며 능숙하게 다림질을 하게 되었다. 시집올 때 가져 왔던 그 다리미는 워낙 견고하게 만들어서인지 몇 번 줄을 바꾸긴 했으나 한 번도 고장이 나지 않아서 아이들은 우리 집 골동품 중의 하나라고 말하곤 했다.

 

  올 봄에 남편이 일본에 갔다가 다리미를 사가지고 왔을 때도 아직 쓸 만한 것을 바꾸기가 아까워서 괜히 낭비처럼 생각 되었다. 그러나 분홍색의 플라스틱 소재로 만든 최신형 다리미를 써 보고는 그만 그것에 매혹되고 말았다. 모양도 작고 예쁠 뿐만 아니라 아주 가볍고, 줄이 필요 없는 충전식으로 되어 있어서 아무 데나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더구나 자동 스팀 장치가 되어 있어 물 뿌리게를 쓰지 않아도 되며, 섬유의 질에 따라 저절로 온도 조절이 되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더구나 나같이 정신없는 사람이 전원을 연결한 채로 다른 일을 하다보면 ‘삐삐’ 하는 경보음을 울려 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반갑지 않은 선물이라며 시큰둥해 하던 다리미를 요즘은 무엇보다도 요긴하게 쓰는 나를 보고 남편은 변덕스럽다고 놀리곤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한 것이 전에는 우리 집 가보 중에 하나라고 자랑하던 헌 다리미를 이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나 헌 다리미가 비록 새것에 밀려 쓸모는 없게 되었어도 선뜻 버릴 수가 없었다. 옛날 고리짝 속에서 처음 꺼내 보았을 때의 그 반짝거리던 광택도 없어지고 모양도 매우 낡아 버렸지만 그것은 어머니가 딸을 위해서 어려운 살림을 쪼개어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젠 모두 없어져 버린 혼수품 중에 그것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사랑이 나를 따듯하게 해줄 것 같아서이다.

 

  살아가면서 이해나 타산 때문에 마음이 옹졸해질 때, 사는 것이 허무하고 우울해질 때면 나는 그 헌 다리미를 꺼내 다림질을 할 것이다, 그러면 차가워진 가슴도 서서히 사랑의 전원으로 연결되어 뜨거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험난하고 숨 가쁘게 살아오신 어머니의 인고의 삶이 생각나고, 나 혼자 힘들게만 느껴지던 삶의 주름살도 반듯하게 펴 줄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다림질을 끝내고 목욕을 하고 나니 비 개인 오후처럼 상쾌함이 기분 좋은 피로를 몰고 온다.

 

                                                                                                                                                            199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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