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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창 가에서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5.

창(窓) 가에서

한 향순

 

  햇볕이 따사로운 아침이다. 정신없이 북새통을 치르고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간 후, 잠시 쌓인 일거리를 접어둔 채 커피를 끓여 거실 창 앞으로 나온다. 늘 그렇듯 선 채로 창 밖의 모습을 꼼꼼히 둘러보며 천천히 차를 마신다. 왼쪽으로는 고압선 철탑 밑으로 줄줄이 늘어선 차들의 행렬이 여전히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고 등교시간이 임박한 아이들의 걸음이 분주하다.

 

  마주 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창들이 굳게 닫힌 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그 너머로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 구룡산이 정답게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눈길이 머무는 곳은 양재천 둑 밑으로 만들어 놓은 가로공원의 나무들이다. 며칠 전 까지도 꽃샘추위로 심술을 부리던 날씨가 풀린 탓인지 나무 가지 끝마다 물이 오르고 연녹색 새순이 꼬물꼬물 터져 나오고 있었다.

 

  “아, 정말 봄이구나.” 하는 탄성과 함께 오늘은 답답한 일상을 밀쳐내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고 싶은 유혹이 창을 통해서 전해져 온다. 그렇지만 선뜻 창문을 열지 못하고 눈으로만 봄을 느끼는 것처럼 쉽게 틀에 박힌 생활을 탈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이곳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십 여 년을 넘게 살던 산동네 주택에는 거실에 두개의 창이 있었다.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을 열면 나지막한 벽돌담이 거치적거림 없이 마주 보이는 산이 흡사 집을 감싸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의 현란한 색채가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녹음이 우거지는 초여름이면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향수에 젖게 하였다.

 

  또 다른 서쪽 창을 열면 우리 집보다 지대가 낮은 앞집의 울안이 전개도처럼 펼쳐져 보이고 그 집 식구들의 생활모습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창부터 활짝 열고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오늘같이 화창한 날에는 행진곡이라도 크게 틀어놓고 신나게 총채질을 해대면 겨우내 먼지가 끼었던 집 안팎과 기분까지도 산뜻하게 밝아지곤 했다.

 

  산이 있기에 늘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고 감격하게 만들던 남쪽 창도 좋아했지만, 다정한 이웃과 왕성한 생활이 있는 서쪽 창도 솔솔 삶의 재미를 안겨 주었다. 몰래 아랫집의 부부 싸움을 엿보는 재미도 있었고 맛있는 음식을 하면 꼭 들켜 버려서 담장 너머로 나누어 먹던 일은 이웃끼리의 따뜻한 정을 오고 가게 하였다.

 

  요즘 아파트의 창들은 전에 비해서 훨씬 크고 넓어졌다. 그런데도 더 넓히기 위해서 벽을 털어 내고 개조를 하는가 하면, 시야를 확 트이게 하려고 통 유리로 바꾸는 집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창을 여는 일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소음이나 먼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청소를 할 때에도 총채와 빗자루보다는 진공청소기를 많이 사용하고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사용하는 집들은 꼭꼭 창을 닫고 산다.

 

  새로 지어지는 도심의 빌딩들도 비슷하다. 요즘은 건물의 외벽을 유리로 처리해서 외관상으로도 멋지고 안에서 밖을 볼 수 있어서 좋지만 전혀 여닫을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창들이 많은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창을 열 수 없으므로 빤히 보이는 바깥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되는 것이다.

 

  공기나 소리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사이도 하나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완전히 별개의 생활을 한다. 창을 닫는다는 것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창을 닫고 폐쇄된 공간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사람의 마음마저도 굳게 닫혀 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타인을 거부하고 점점 자신의 벽 속에 안주하려는 것이, 누구에게도 자신의 생활을 침해받기 싫어하는 현대인의 속성인지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나와 내 가족의 안일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남의 아픔을 구태여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외로울 때는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었고, 힘들고 아플 때는 남의 도움을 받으려고만 했지 내가 남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에는 마냥 인색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이렇게 편안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조차도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과 헌신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안다.

 

  가만히 창문을 열어본다. 아직은 찬 공기가 확 밀려들어온다. 집안도 창문을 열어 공기를 바꾸듯이 내 마음에도 구석구석 환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내 마음을 활짝 열어 남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남은 삶을 외롭지 않게 해 줄 가장 훈훈한 방법이라는 것을....

 

                                                                                                                                          199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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