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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호숫가의 아침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4.

호숫가의 아침

한 향 순

 

  꿈결인 듯 낯선 소리에 눈이 떠졌다. 어느새 동이 텄는지 집안은 훤하게 밝았다. 화들짝 놀라 옆자리를 보니, 새벽잠이 없는 남편은 벌써 산책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눈을 비비며 커튼을 젖히고 나니 건너편의 숲과 호수가 기지개를 켜며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서야 비몽사몽 중에 들리던 화음이, 높고 낮게 어우러진 산새들의 울음소리였음을 깨우친다.

 

  아직 주인댁에 기척이 없는걸 보니, 활동하기엔 이른 시간인 듯싶어 살그머니 현관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라지만 상큼한 새벽공기 때문인지, 드러낸 팔에 선뜻함이 느껴진다. 나는 아무도 몰래 집을 빠져나와 아주 천천히 호숫가를 걸었다. 싱싱한 초록의 숲은 잔뜩 물기를 머금고 있었고, 가뭄으로 수위가 낮아진 호수는 모래바닥을 드러내며 애타게 갈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아마 곧 다가올 장마철을 대비해서 미리 물이라도 빼어 놓은 모양이었다. 이제 장마가 지면 계곡마다 넘치는 물은 성난 노도같이 호수로 밀려들어 호수를 흙탕물로 출렁이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평화롭게 유영(遊泳)을 하는 저 오리 떼들은 어디로 피난을 갈까 걱정이 된다. 비를 애타게 기다리며 반쯤 허리를 드러낸 호수를 보고 있자니, 항상 가득 채워지기를 열망하는 우리의 마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가끔은 텅 비어있는 듯한 허전함 때문에 무엇인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며 조바심을 치는 때가 있다. 비워있어야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면서도, 그런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미망(迷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못내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 어찌 당장 내뱉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뜨거운 태양아래 자신의 일부를 수증기로 말리는 호수처럼, 인고(忍苦)의 시간 뒤에나 터득하는 깨달음의 열매일 것이다.

 

  어느덧 해가 많이 올라와 있다. 고개를 돌려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니, 병풍처럼 낮게 감싸 안은 산자락 속에 그림처럼 예쁘게 지은 하얀 집이 호수를 바라보며 나란히 서있다. 아치형으로 지은 위 동은 엊그제 준공된 별채로 운치를 더해준다. 그 동안 잔디가 자라서 푸르러진 정원에는 아기자기한 꽃밭을 만들어 갖가지 꽃을 심었고, 건물 입구에 심은 잘생긴 소나무와 자연석의 어우러짐이 집을 훨씬 돋보이게 한다. 울타리 대신 삼각추 모양의 주목을 심어 경계를 만들었고, 위 동의 정원에는 둘이 탈 수 있는 귀여운 그네까지 만들어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년 전 봄, 친구 부부와 처음 와본 이곳은 너무 쓸쓸하고 황량한 산자락이었다. 근처에 시골집이 한 채 있기는 했지만, 사람 그림자는 찾아볼 수도 없고 버려진 밭에는 잡초만 우거져있었다. 친구가 오래 전에 호수가 보이는 주변경치에 반해 땅을 사 두었는데,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으니 이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고 했다. 아직 도시생활에 미련을 못 버린 친구의 남편은 그런 부인의 의견에 반대했으나, 자연을 좋아하고 전원생활을 꿈꾸던 친구는 오랜 염원(念願)을 이루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젊지도 늙지도 않은 오십대 부부에게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며 전원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 부부에게 자문을 받기 위해서 동행한 길이었었는데, 우리는 섣불리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변 산세(山勢)와 호수의 경치가 너무 아름답고 물과 공기가 하도 좋아서 노후에 마음을 비우고 욕심 없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일 년 전, 친구는 드디어 오랜 꿈을 실행에 옮겨 이곳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전원생활이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는 하지만,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지 겁을 내는 나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그녀는 해낸 것이다. 가녀린 몸매에 연약해 보이는 친구의 어디에 그런 용기가 숨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겉으로 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자락이 깊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앞뒤 사리를 분별할 줄 알았고, 겸손함도 잃지 않는 친구는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 용기도 있었다. 몇 년 전 IMF의 여파로 내가 감당키 어려운 시련에 빠졌을 때, 곁에서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던 친구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기며 발길을 돌려, 오던 길을 되짚어 간다. 겨울에는 눈이 많아 겨우내 눈꽃을 볼 수 있다는 청계 호숫가. 달이 밝은 밤이면 집 앞의 자작나무가 하얀 너울을 쓴 듯 돋보이는 테라스가 아름다운 집. 그 집에서 나무를 닮은 모습으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갈 친구 부부의 모습을 그려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아직 집 안팎은 조용하기만 하다. 뒤뜰에는 어제 밤 질펀하게 벌인 바비큐파티와 열띠게 응원하던 축구경기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술병과 음식물의 잔해가 남아있다. 내 발소리에 놀란 산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개 짓을 하며 날아오른다. 테라스에 올라와 눈부시게 밝아오는 숲 속의 아침을 맞으며 신의 축복이 오랫동안 이 집에 함께 하길 빌어본다.

 

                                                                                                                                                    200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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