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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자동응답 전화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14.

자동 응답 전화기

한 향순

 

  아침부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외출할 일을 뒤로 미루고 집에서 보내던 하루였다. 밀렸던 일을 대충 끝내고 나서 모처럼 한가해진 시간에 친구들과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려본다. 몇 군데나 부재중의 신호음만 울리더니 드디어 한 곳에서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반갑고 낯익은 음성 대신에 “지금은 외출 중이오니 신호음이 울리면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녹음이 된 사무적인 음성이 들려온다. 전혀 예기치 않은 목소리에 당황하여 “저어 아니...”하고 더듬거리다가 황망히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그러고 나니 슬그머니 화가 난다. 비 오는 날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고 친구가 보고 싶어 안부라도 물으려 했던 감정을 어떻게 용건만 간단히 상대방이 없는 전화기에다 대고 쏟아 놓으라는 것인가. 아직은 자동 응답 전화기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급한 사람에게는 요긴하고 유용하게 쓰일 기구가 맨살에 차가운 금속성 물질이 닿을 때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새로운 것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나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처음 인터폰이 선보이기 시작하던 십여 년 전쯤 단독주택에 살고 있을 때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이들이 들락거리던 시절, 매번 뛰어나와 대문을 여닫는 일이 보통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남편을 설득하여 대문에 인터폰을 설치하고 보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몰랐다. 일일이 누구냐고 소리치며 물을 일도 없고 집안에서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철커덕 하고 대문이 열리는 것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요술의 문과도 같았다.

 

  함께 좋아해 줄 것으로 알았던 남편이 어느 날 화가 잔뜩 나서 말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만은 절대로 인터폰을 사용하지 말고 직접 나와서 대문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편리하고 유용한 물건을 쓰지 말라니, 엉뚱하게 무슨 까다로운 주문이냐고 물었다. 그는 피곤해진 몸으로 집에 왔는데 아내가 반겨 웃으며 열어주는 대신, 철커덕하는 기계음 소리에 알 수 없는 배반감과 함께 화가 나더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남편이 속 좁게도 투정을 부린다 싶었는데, 어제 전화기에 녹음된 사무적인 목소리를 듣고 나니 그 당시 남편의 기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계 문명의 발달로 머지않아 안방 컴퓨터 시대가 온다고 한다. 가만히 앉아서도 밖의 볼일을 대신할 수 있고 모든 가사(家事)까지도 스위치만 누르면 기계가 대신해주는 편한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나 같은 주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람은 자꾸 편해지기 위해서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자기도 모르게 길들여진다. 편한 것에 맛들이다보면 마치 마약과도 같이 좀처럼 헤어나기가 어렵다. 끝내는 기계의 의존 없이는 살 수 없는 중독자가 되어 점점 인간성까지 삭막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나의 지나친 기우(杞憂)일까.

 

  나는 요즘 단독주택보다는 살기 편하게 지어진 아파트로 이사 와서 살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연탄불을 갈던 예전보다는 훨씬 편해진 생활인데도 주부의 일손을 덜어주는 많은 기계들에 유혹을 느끼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 모델을 내놓고 있는 가전제품들을 보면 과연 다음 세대의 주부들은 자기의 할 일을 기계에 빼앗기게 되어 모두 실직자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상상마저 든다.

 

  비를 흠뻑 맞고 한층 더 푸르러진 창밖의 나무들이 싱싱하게 뻗어 오르고 있다. 온갖 공해와 소음에 시달리면서도 척박한 땅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려 의연하게 서 있는 가로수를 보며 생각한다. 편하고 안이함을 탐하는 나 같은 사람보다는 힘들고 고단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은 건강하고 따뜻한 사회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편리하게 만들어진 기계를 외면할 용기는 없지만 사람들의 심성마저도 편리한 기계처럼 스위치 하나로 작동할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199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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