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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특별한 초대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7. 24.

특별한 초대

 

  요즘 매주 목요일이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가는 곳이 있다. 그는 나를 귀한 손님으로 정중하게 초대하기에 흐트러진 머리도 가다듬고 옷매무새도 고치며 오랜만에 해후하는 연인을 만나러가듯 내 마음은 달콤한 기대에 잔뜩 부풀러 있다.

 

  그는 더러 처음 대하는 사람처럼 아주 낯선 생소함을 안겨주기도 하고 낯가림이 심한 나를 어리둥절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어느 때는 운 좋게도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옛날처럼 나의 귀에다 달콤한 밀어를 속삭여주거나 질풍과 노도(怒濤)같은 열정의 도가니로 이끌어 준다. 나는 잠시 현실을 잊고 그를 따라서 푸른 잔디 위에서 춤을 추거나, 격정적인 포옹에 몸을 떨며 짜릿함을 맛보기도 한다.

 

  이렇게 그를 다시 만난 것이 얼마만인가. 정말 그동안은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와 은밀하게 나누는 대화보다는 가깝게 접할 수 있고 시끌벅적하지만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옛 연인쯤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와 다시 해후하게 된 것은 거의 이십 오륙년쯤 되는가보다.

 

  작년에 동네에 있는 여성회관에서 오페라 공연이 있다기에 보러 갔다가 우연히 어떤 안내장이 눈에 띄었다. “목요 클래식 인비또(invito)”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은 이태리어로 “초대”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떤 초대인가 하고 읽어보니, 매주 목요일마다 그곳에서 클래식 감상회를 열고 있었는데 입장료는 그야말로 차 한 잔 값도 안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찾아간 그곳에서, 오랜만에 접한 클래식 음악은 세월에 찌들어 가물가물 꺼져가던 내 감성에 불씨를 당겨주었다. 아주 오래전에 즐겨 듣던 곡들은 그동안 무심했던 나의 변심을 질책하거나 타박하지도 않고 나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긴 포옹을 하고 나자 우리는 오랜 공백을 뛰어 넘어 대번에 화해를 하고 말았다.

 

  더구나 예전에는 소리로 밖에는 들을 수 없던 현란한 연주를 커다란 대형 스크린을 통해서 세계의 거장들과 만나고 시간을 초월한 모습들을 보니, 정말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에 와서 음악회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에다 유능한 해설자가 나와서 중간 중간 곡의 해설까지 해주니 나같이 무식한 관객에게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처녀 때 가끔 음악 감상실에 가거나, 멋으로만 듣던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70년대 말쯤부터이다. 여섯 살짜리 아들이 사고로 눈을 다치고 난후, 나는 자책감과 괴로움에 빠져 사람들을 멀리 했다. 빤한 동네에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달고 무성했고, 진실보다 헛소문을 듣고 위로하러 오는 사람들이 고맙기는커녕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를 구원해주고 위로해 준 것이 음악이었다. 이웃에서 금식기도를 해준다거나 종교에 의지하도록 끌어주는 손길도 매몰차게 마다하고 오로지 집에 틀어박혀 음악만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슨 오기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사람이 그립고 외로웠다. 누군가 내 진심을 알아주고 “너는 아무 잘못도 없다. 단지 어미가 된 잘못이지”라고 말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입을 닫고 사는 동안, 음악 속에는 내가 말로 하고 싶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울분과 분노 같은 감정들이 그대로 들어있었다. 처음에는 누구의 무슨 곡인 줄도 모르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무조건 볼륨을 크게 하고 들었다. 그러다가 차츰 곡이 귀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음악의 느낌도 알아 가고 제법 좋아하는 곡도 생겼다.

 

  그 당시에는 레코드점에 가서 LP판을 사다가 흠집이라도 날까봐 아껴가며 듣곤 했는데, 이듬해 남편이 해외 근무를 하면서부터는 “데카”나 “그라마폰”같은 원판들을 구해서 보내오는 바람에 월급쟁이로서는 분에 넘치는 음반들도 소장하게 되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다보니 음향기기도 몇 번 바꾸고 제법 음악 애호가 흉내도 내곤 했다.

 

  그렇게 칩거하던 몇 년 후, 나는 세상과 다시 화해를 하고 밖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취미생활이나 운동을 한다며 바쁘게 살다보니 클래식 음악은커녕 대중가요도 진중하게 듣기 힘들어 졌다. 가끔 음악회에 가거나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어도 커다란 감동은 없이 그저 무심코 흘려듣곤 했다.

 

  그런데 나이 탓인가 외로움 탓인가? 요즘 들어 클래식 음악이 다시 귀에 들어 왔다. 아무래도 “특별한 아침을 여는 인비또”덕분인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격정적인 울림은 아니더라도 다정한 친구처럼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잔잔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게다가 음악을 같이 듣기 위해서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친구 덕분에 친구도 만나고 음악도 들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같은 취미를 즐기고 같은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어쩌면 아주 사소한 일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요즘은 그 사소한 일마저도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라틴어로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젊을 때는 그저 앞만 보고 살았다. 이제 나이를 먹고서야 그런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러기에 특별한 초대가 더욱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200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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