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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은총

by 아네모네(한향순) 2012. 12. 21.

 

 

 

은총

 

 

 

소녀는 어려서부터 늘 병약했다. 10살 때, 콜레라를 앓아서인지 체구도 또래보다 작았고 오랜 지병인 천식까지 가지고 있어 늘 힘들어했다. 그러나 성격만은 단순하고 유쾌한 아이였다.

 

가난한 방앗간집의 맏딸로 태어난 소녀는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도 다니지 못하여 문맹이었고, 제대로 종교 교육도 받지 못했다. 소녀가 14살이던 그해 2, 땔감을 찾기 위해 강변을 서성이고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 동굴의 움푹 들어간 자리에 어떤 여인이 서 있었는데, 흰 옷에 하얀 베일과 파란색 허리띠를 두른 여인의 등 뒤로 알 수 없는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는데 소녀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여인 앞으로 다가가서 잠시 묵주기도를 바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소녀는 삼 일 후, 일주일 후에도 다시 그 동굴을 찾았는데, 역시 젊은 여인이 나타나서 앞으로 15일 동안 매일 그곳에 와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소녀가 바로 프랑스 남서쪽, 피레네 산맥 근처의 작은 마을 루르드에 살고 있던 <베르나데트 수비루>였다. 베르나데트는 그 후 보름동안 매일 동굴로 가서 젊은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소녀에게 조금씩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회개를 하고 죄인을 위해 기도하십시오.”라던가 사제들에게 전해 이곳에 성당을 지어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근처의 샘물을 가리키면서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라고 하였다.

 

소녀의 말을 듣고 많은 동네사람들이 동굴의 젊은 여인을 보기위해 몰려갔으나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아 모두 실망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1858211일부터 716일 까지 소녀는 루르드의 가브 강변에 있는 마사비엘르 동굴에서 18회에 걸쳐 동정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체험한 것이다.

 

베르나데트는 이 발현에 의혹을 품은 이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느라 다른 도시로 피신을 했다. 그리고 느베르의 성 질다르 수녀회에 서원을 하고 그곳에서 기도생활을 하며 은둔하다가 35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러나 1862년 타르브 교구의 로랑스 주교에 의해 루르드는 공식적으로 성모 발현을 인정한 순례지가 되었고, 그곳에 지금의 동굴 성당이나 로사리오 대성당, 성모마리아 대성당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가톨릭 사진가회에서 성지순례 겸 사진촬영 여행을 간다기에 선뜻 따라 나섰다. 벨기에와 프랑스 안의 성모 발현지와 오래 된 수도원 등을 돌아보며 사진촬영을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을 끌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영세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지만 성격 탓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해왔다. 주위의 친구들이 열심히 봉사도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정말 내가 가톨릭 신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지 부끄럽기도 했다.

 

우선은 벨기에의 반뇌보랭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 동북부 알자스지방으로 내려오며 스트라스 부르크와 와인 가도에 있는 중세 마을들을 둘러보았다. 알자스 지방의 도시들은 중세의 성곽과 성채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고풍스럽고 아름다웠으며 프랑스 북동쪽에 있는 포도주 길에 있는 마을들도 모두 나름대로 개성을 갖춘 아름다운 관광도시였다. 브르고뉴 지방의 도시 콜마르디종을 거쳐 퐁트네와 베즐레, 느베르에 있는 중세 수도원들도 꼼꼼하게 돌아보았다.

 

그 다음 프랑스의 동북부 노르망디 반도에 있는 성 미카엘의 산이란 뜻의 몽 생 미셀 수도원으로 향했다. 밀물 때면 바다위에 섬처럼 떠 있는 몽 생 미셀 수도원은 800년에 걸쳐 지었다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고딕풍의 건물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프랑스인들도 가보고 싶어 하는 관광지 중에 하나인 만큼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이나 순례자들로 북적거려 그 넓은 공간이 좁아 보이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우리가 파리 시내로 입성한 것은 여행을 시작한 지 열흘만이었다.

 

내가 파리를 다시 찾은 것은 꼭 28년 만이었다. 1984년 남편이 해외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나를 유럽으로 불러내 같이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해외여행을 하기도 쉽지가 않았거니와 풋풋한 30대이어선지 파리를 처음 가 본 감동이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았다.

 

우리는 감회에 젖어 다시 찾게 된 파리 시내를 돌아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에펠탑, 그리고 낭만적인 세느강 등은 많은 세월을 머리에 이고도 아무런 변화 없이 우리를 맞아주었지만 젊었던 우리는 어느새 초로의 노인들이 되어 오래 된 추억을 떠올렸다.

 

파리에서 밤기차를 타고 이튿날 아침에 툴루즈에 닿은 뒤, 다시 버스로 한참을 달려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 루르드에 도착했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였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훈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루르드에 도착하니 유난히 흰옷에 흰 머리 수건을 쓴 여인들이 많았는데, 그곳에서 몇 달씩 생활을 하며 병자들을 돌보거나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 계신 한국 수녀님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우선 물로 몸을 씻는 침수를 받기위해 길게 늘어선 줄 뒤에 앉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봉사자의 안내로 아베 마리아란 찬송을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순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 왜 느닷없이 눈물이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가슴 밑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루르드에서는 유난히 치유의 기적이 많이 일어나서인지 어딜 가나 휠체어를 탄 병자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침수를 받으려고 기다리는 줄이나, 성체조배를 받으려는 곳에는 어김없이 긴 휠체어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어디서나 그들은 우선순위였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 열리는 촛불미사에도 병자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는데, 비가 뿌리는 날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은 촛불을 밝혀들고 성당을 돌며 간절한 소망을 빌고 있었다. 더구나 이곳에서는 몸의 치유뿐 아니라 마음에 치유를 얻은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루르드에서 사흘 동안 머물면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는지 회개하고 속죄하였다. 설사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망각 속에 빠진다 해도 잠시나마 나를 일깨워 준 것은 성모님의 크나큰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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