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병
이번 감기는 정말 지독했다. 유난히 춥던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드디어 기다리던 봄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혹한에도 잘 버티어 내던 몸이 긴장이 풀려서인지 심한 몸살감기를 거의 삼주 동안이나 앓았다. 그동안 열심히 병원에도 가고 약을 먹었는데도 차도가 없자 혹시 다른 병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그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집에서 근신을 하였다. 나이가 들면 체력도 약해지고 면역력도 떨어지는 것이 당연할 텐데 가끔은 그런 것을 잊고 무리를 하다가 호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예기치 않은 일이 어찌 감기뿐이랴. 한치 앞을 모르는 삶의 여정에 가끔씩 불쑥 나타나는 복병 때문에 놀라고 당황하고 허둥거리게 된다. 복병은 말 그대로 아무 준비나 예고 없이 만나기에 대항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실체를 가늠하기가 더욱 어렵다. 더구나 전혀 예상을 못하였기에 대부분 그놈에게 참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얼마 전에는 사진촬영을 위해 열흘쯤 미국으로 출사를 다녀왔다. 미국현지에 가서 가이드를 만나 안내를 받아야하는데 공항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의 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행여나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시간까지 기다렸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서툰 영어로 항공사 직원에게 상황을 말하자 그는 연락처를 적어놓고 집에 가서 무조건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곳에 집이 없고 여행을 하기 위해 입국한 여행객이라고 설명을 해도 똑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하는 수 없이 공항로비로 나와 우리를 눈 빠지게 기다리던 가이드와 다른 일행들을 만났다. 그동안의 정황을 말하고 혹시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일 난감한 것은 잃어버린 트렁크 안에 촬영장비와 삼각대가 들어있어 그것을 쓸 수 없는 일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우선 급한 대로 마트에 가서 대용품을 사가지고 쓰기로 했다. 손해는 고사하고 비슷한 물건도 제대로 없어 한참을 망설였지만 전쟁에 나가는 군인이 무기가 없는데 어쩌겠는가.
다행이 카메라는 배낭 속에 들어있어 무사했는데 그날부터 여행하는 내내 불편을 겪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우선은 갈아입을 옷도 없고, 필요한 것이 있어 찾다보면 꼭 잃어버린 짐 속에 넣어둔 것이었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 할 수도 없어 일행들의 눈치를 보며 불편함을 감수하였는데 또 일이 터진 것이다.
며칠 동안 사막에서 촬영을 하다 보니 모래바람이 들어갔는지 카메라가 고장 난 것이다. 그야말로 앞이 캄캄해지며 낙담이 되었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빡빡한 여행 일정을 소화하다보니 개인적인 사고는 수습하기가 어려웠다.
가뜩이나 기운이 빠져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정말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새벽 두시에 호텔을 나와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던 날이었다. 운전과 가이드까지 겸하던 안내자가 피곤해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캄캄한 어둠속에서 우리도 잠시 눈을 부치고 있는데, 어디선가 총을 든 미 헌병이 다가오더니 모두 손을 들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수런거리는 우리에게 범죄자 취급을 하며 얼른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위로 들라는 것이었다.
새파랗게 겁에 질린 가이드는 미국에서는 공권력에 도전하면 큰일이니 어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강적의 복병을 만난 것이었다. 날씨는 추운데 아무 잘못도 없이 영화에서 본 것처럼 손을 들고 떨어야했다.
안내자의 설명은 우리가 쉬고 있던 곳이 함부로 들어 올수 없는 핵 관련 지역인데, 자기가 어두워서 잘 모르고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러면 철책을 해놓던지 무슨 경고를 해 놓아야지 아무런 제재도 없이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우리 일행들은 겁에 질린 채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곳은 언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였다.
며칠사이에 연이어 곤란한 일들을 겪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필 운수가 사나운 때에 공연히 여행을 떠나와 외국에서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두어 시간 후, 여권을 조회 한 후에 우리의 신원이 확인되어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그날 일정은 엉망이 되고 정말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사건이었다.
다행이 잃어버렸던 짐은 돌아오는 날 다시 찾았지만, 정작 필요했던 여행기간에는 써보지도 못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여행 중에 그런 일들이 생길 것 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대비책도 없이 고스란히 당한 꼴이었다. 귀국하여 카메라도 수리를 하였지만 그 먼 곳까지 가서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이 무엇보다 컸다.
이제 남녘에는 꽃소식이 들려오고 머지않아 이곳에도 질탕한 꽃들의 잔치가 무르익을 것이다. 다행이 이번에는 복병을 만나 큰 상처 없이 일전을 치르었지만 언제 다시 그놈을 만나 참패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그저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던 친구의 말에 공감하며 그 말을 다시 되새겨 보는 하루이다.
< 2013, 에세이 21 여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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