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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노인 자격증

by 아네모네(한향순) 2013. 8. 31.

 

 노인 자격증

 

 

                                                           한 향 순

 

드디어 카드가 나왔다. 빨간 바탕에 황금빛 사각형 로고가 있고 영어로 커다랗게 G-pass 라고 쓰여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면 영어 밑에 아주 조그만 글씨로 지 패스 우대용 교통카드라고 적혀있다. 카드를 받아들고 은행 문을 나오니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정말 묘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우대용 교통카드도 받았으니 누가 뭐래도 노인의 대열에 들어섰다. 전철에서 경로석에 떳떳하게 앉을 수도 있고 국립공원이나 관광지에 가서 흘끔흘끔 눈치 보며 경로우대를 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화장품으로 분장을 한다 해도 더는 나이를 숨길 수가 없다. 그런대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나는 아직 노인이 아니라고 도리질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기억력이나 판단력도 그리 떨어진 것 같지는 않고 이렇게 허리도 꼿꼿한데 노인의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이 어쩐지 억울하다는 느낌이었다.

 

카드를 받아들고 집에 오는데 착잡한 기분이 들어 옆에 앉은 남편이 밉기까지 하였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무슨 중요한 용무라도 있는 것처럼 동사무소에서 무슨 우편물이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온 것이 없다고 하자 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나오지? 혹시 누락이 된 거 아닐까?”라며 궁금해 하였다. 그 말뜻을 오늘 은행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예전에는 만 65세 생일이 다가오면 교통카드를 발급 받으라고 우편으로 미리 알려주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급한 일이라고 생일날 기어이 은행까지 데리고 와서 카드를 받게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언젠가는 해야 하고 지나야 할 관문이지만 그까짓 전철요금이 얼마나 된다고 이리 서두를까 생각하니 괜히 부아가 났다. 남편은 스스로 지공선사라는 말을 자주 썼다. 지공선사는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세대를 빗대어 하는 말이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아주 떳떳하였다.

 

그리고 직행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도 몇 번씩 바꿔 타야 하는 전철을 자주 이용했다. 정말로 전철이 좋아서인지 버스비가 아까워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하고는 정 반대이다. 나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바꿔 타는 번거로움이 없는 직행버스를 좋아한다. 좌석버스를 타고 편안히 앉아 눈이라도 부치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왕 교통카드를 받았으니 한번 써보기로 작정하고 전철을 탔다. 빨간 카드를 누가 볼까봐 예쁜 지갑에 넣어 출입구에 대었다. “~”소리가 나는데 계기판에는 00 이라는 숫자가 찍힌다. 역시 공짜라는 의미일 것이다. 퇴근시간이 되어서인지 전철 안은 매우 복잡하고 사람들로 붐볐다. 혹시나 하며 경로석을 흘끔거렸으나 역시 빈자리가 없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겨우 손잡이를 하나 차지하고 매달려있는데 다리는 아프고 어깨에 멘 가방이 천근만근이다.

 

에고 이 시간에 전철을 타는 내가 어리석지후회를 해본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혹시 누가 내릴 기미가 보이는지 눈치를 보다가 얼마 전 친한 후배가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그 후배는 젊은 사람들과 취미생활을 함께하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요즘 세대 간의 갈등이 너무 큰 것 같아 자주 놀란다고 했다. 노인 인구는 점점 많아지고 노인을 부양해야 할 젊은이들은 살기 힘들어서 그러는지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낸다고 했다. 더구나 복잡한 출퇴근 시간에 왜 노인들이 전철을 타고 다니느냐며 울분을 터트렸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 키우면서 생업에 매달려야하는 젊은이들은 시간을 쪼개어 동동거려야하는 생활이겠지만 노인이라고 모두 하릴없이 놀러만 다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출근하는 자녀 대신 손자를 보러가는 중요한 임무를 가진 이도 있을 테고, 나름대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 노인이라고 하면 유유자적 놀러만 다닌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잣대로 폄하하기 십상이라고 한다.

 

하기는 노인들도 젊은이들을 못마땅해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젊을 때는 어떻게 했는데 요즘 젊은 것들은...”하며 그들의 울분을 이해하고 감싸주기보다는 그저 왜곡된 시각으로만 보며 한심해 한다. 더구나 요즘 노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 중에 너희 들은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다.”라는 냉소적인 에피소드도 있다. 노인이 되는 것은 유쾌하지는 않지만 꼭 슬픈 일만은 아닐 것이다.

 

어느 시인의 <나이 듦의 행복>이란 시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 그러므로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과 살아가기

그것은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즐기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의 묘미이고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일 것이다.

 

요즘은 여러 자격증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예전보다 아버지 학교나 노인대학도 많아졌다. 그런 곳에서 노인이 되는 마음가짐과 인생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 노인 자격증을 준다면 어떨까. 그런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면 우대용 교통카드보다 훨씬 풍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2013, 계간수필 가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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