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끈
한 향 순
바람이 많이 불던 날 바다에 나갔다. 작은 포구에는 밀물 때인지 방파제 가까이로 물이 출렁이며 들어오고 있었다. 방파제 아래에는 긴 밧줄이 매어져 있었는데, 저 멀리에 배 한척이 긴 줄에 간신히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바닷물 속에 잠겨서 배를 지탱하고 있는 밧줄을 보니 세찬파도에 부딪쳐서 혹시 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저 배는 어찌될까 걱정이 되었다.
괜한 걱정인줄 알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요즘 전시 준비 중인 사진작업에 골몰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작업 중인 사진의 주제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연의 끈인데 사진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나의 생각을 제대로 담아 낼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는 중이었다.
사람은 태어 날 때부터 부모를 비롯하여 형제자매 등 여러 인연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점점 자라면서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들고, 성인이 되어서는 배우자와 자식 등 새로운 인연을 만들며 살아간다. 가족을 이어주는 인연의 끈은 탯줄처럼 끈끈한 생명의 끈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나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는 인연들이 더없이 소중하고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을 옥죄는 굴레로 느껴져서 갈등을 겪을 때도 있고, 또는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인연이 꼬일 때도 있다.
굵은 밧줄처럼 든든하게 나를 지탱하게 해주던 인연의 끈이 끊어졌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미리 생각하고 여러 사람들과 고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전시작품의 주제를 <인연의 끈>으로 정하고 여러 각도에서 깊은 생각을 하며 작업을 해 오던 중이었다.
지난여름에 썰물이 되면 잠깐씩 물위로 드러나는 ‘석섬’이라는 무인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밀물이 되면 섬은 흔적도 없이 물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 때만 잠깐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고운 모래로 된 석섬의 모래톱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우리는 물이 빠진 틈을 이용하여 신비한 섬의 풍경을 촬영하기 위해 서너 시간 동안 그 섬에 머물렀다. 그런데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그곳에도 버려진 닻들과 밧줄들의 잔해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물이 빠지면 큰 배들은 포구 안으로 들어 올수가 없어 아마도 이곳에 정박을 했나보다.
버려진 닻과 밧줄이 있는 곳은 침식작용 때문인지 모래가 패어 웅덩이가 되었고, 그곳에는 바닷물이 고여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지금은 쓸모없는 폐기물이 되었지만 한때 한 몸처럼 묶여있던 배와의 끊어진 인연을 아쉬워하는 듯이 보였다. 인적이 없는 아름다운 모래섬에 널브러진 녹슨 닻과 밧줄은 제 소임을 다하고 늙어버린 노인 같이 외로워 보였다. 그런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아서 나는 아름다운 풍광은 제쳐두고 그것들을 찍는데 열중했었다.
반평생을 우리 부부와 함께 했던 친구 부부가 있었다. 젊을 때는 스키나 골프 등 좋아하는 스포츠를 우리와 함께 즐겼고, 등산과 여행을 좋아해서 주말마다 함께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작년 봄에 건강하던 친구의 남편이 갑자기 몹쓸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후, 혼자 남은 친구는 끈 떨어진 연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아이들은 모두 성가하여 제 갈 길을 가고 노년의 두 부부만 서로 의지하고 살았는데, 한 사람이 먼저 가버리고 나니 남겨진 사람의 빈자리가 너무 큰 것 같았다. 겉으로는 씩씩하게 잘 지내던 친구가 요즘 자꾸 병치레 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홀로서기가 너무 힘든가보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가는 길이라고 아무리 되 뇌이고 연습을 해도 그런 상황이 막상 앞에 닥치고 나면 있는 힘을 다해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만 되는가보다.
일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우리가 살던 복잡한 도시도 때로는 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혀 복닥거리던 관계가 부담스러워 막상 섬을 탈출해보지만 도시의 방랑자들이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결국 콘크리트 숲속의 외로운 섬이다. 그 섬에서 맺은 질긴 인연들이 어느 때는 나의 존재를 새삼 확인시키고 지탱해 주는 밧줄이 되는지도 모른다.
방파제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가니 갈기를 세우며 달려오던 밀물도 기세가 꺾이고 어느새 바람도 잔잔해져 있었다. 갯벌에는 조개껍질과 소라껍질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는데, 생뚱맞게도 커다란 몽돌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것을 보았다. 무슨 용도로 돌을 매듭처럼 꼼꼼하게 묶어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쓸모없이 갯벌에 딩굴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돌이지만 형벌 같은 매듭이라도 풀어주어야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찍은 작품 속에는 외줄 끝에 매달린 조각배도 있고 무인도에 버려진 닻과 밧줄 타래도 있으며 매듭으로 꽁꽁 묶어놓은 몽돌도 등장한다. 또 어떤 것들이 의미를 담고 보태어질지는 모르나 나의 인연의 끈이 오래 단절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 에세이 2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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