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반란
갑자기 어디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집안 구석구석을 살폈으나 주방에도 베란다에도 아무런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서재를 열어 보고는 기겁을 했다. 한쪽 벽면에 세워둔 책장들이 모두 엎어져서 방안 가득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문도 열어 놓지 않은 방에 태풍이 분 것도 아니고 누가 일부러 책장을 넘어뜨린 것도 아닐 텐데 왜 멀쩡한 책장이 넘어져서 이런 불상사가 생긴 것일까 의아했다. 그러나 궁금해 할 여유도 없이 산더미처럼 흐트러진 책들을 정리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고 맥이 풀렸다.
더구나 내가 책에 손을 대자 책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모두 일어나서 내 주위를 맴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니 춤이라기보다는 나에게 항의나 데모를 하듯 달려드는 것 같았다. 우리 집 책들이 자신을 천대하던 주인에게 드디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처음에는 내 주위를 빙빙 도는 것 같더니 점점 나를 향해 옥죄어 들어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곳을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다가 잠이 깼다.
근래에는 거의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했는데 이런 꿈을 꾼 것을 보니 아무래도 어제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다시 자려해도 쉽게 잠은 오지 않고, 꿈을 깨고 나서도 등골이 서늘해져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하게 책을 돌보지 않았기에 이런 꿈을 꾸지 않았나 하는 자책마저 들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작년 12월 초부터 강추위가 몰아닥치더니 올해 들어 한강이 꽁꽁 얼어붙고 인근 바다에까지 유빙이 둥둥 떠다닐 정도로 추위가 풀리지 않았다. 어제 오후, 무엇을 찾으려고 다용도실을 열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베란다에 붙은 다용도실에 습기가 가득 찬 것은 물론, 벽에서 물이 줄줄 흐르며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아마 아파트 외벽에 노출된 곳이 온도 차이로 인해서 균열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때서야 놀라서 다용도실에 넣어둔 집기들을 꺼내보니 비닐로 꽁꽁 포장을 해둔 물건들은 괜찮았지만 종이 포장이나 박스에 넣어둔 물건들은 벽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로 인해 시커멓게 곰팡이가 피며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기겁을 하여 다용도실 맨 밑에 보관하였던 책들을 끄집어냈다. “에구머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하지.”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 그 귀한 책들이 모두 시커멓게 썩어서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을 한 번도 짐작하지 못했는지 후회와 자책이 밀려왔다. 하긴 먼저 살던 아파트에서는 10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으니 무심 할 수밖에 없었다.
끄집어 낸 책들 중에 제일 마음이 아프고 아까운 것은 5년 전에 펴낸 나의 수필집이었다. 소장본으로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정말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리라고 소중하게 보관하던 책이었다. 내가 공들여 쓴 책이니 나의 분신이자 자식 같이 애착이 가기도 했다. 낙담에 빠져서 행여나 하며 시커멓게 변한 책장을 들추며 수건으로 일일이 닦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상황은 모두가 헛일이었다.
누추하게 변한 책이지만 선뜻 쓰레기통에 버릴 수가 없어 그대로 쌓아놓고 있는데 “그렇게 썩은 책을 누가 본다고 못 버리세요.”라며 딸애가 딱하다는 듯 말했다. 가뜩이나 속상해있던 차에 그 말을 듣자 울컥 부아가 치밀었지만 부인 만 할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하긴 매일 쏟아져 나오는 책의 홍수와 기기 속에서 난무하는 활자도 읽기 버거운 요즘 세상인데, 과연 누가 나의 책에 관심을 갖고 애틋하게 읽어준단 말인가. 우선 나 자신부터 되돌아보면 대꾸할 말이 없다.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몇 개의 수필잡지와 사진잡지 외에도 동호인들이 보내주는 동인지나 단행본들을 받고 나는 얼마나 성의 있게 읽었는지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그나마 글이 좋고 아는 사람의 글은 끝까지 읽게 되지만 대부분은 대충 몇 작품을 읽고 덮어버리던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글을 쓰는 행위도 책을 내는 일도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공들여 쓴 좋은 글이라 해도 읽어 주는 독자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대도 난 올해 두 번째 수필집을 상재했다. 그리고 두어 달 동안은 성의 있게 보내준 독자들의 답신에 도취되어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았다. 정성들여 쓴 한 두 마디의 답신이 글을 쓴 사람한테는 얼마나 큰 힘이 되고 기쁨을 주는지 책을 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오늘은 책장의 문을 활짝 열어 환기도 시키고 먼지도 털어주며 책들과 대화를 나누어야겠다. 말없는 식물들도 사랑과 관심을 주면 쑥쑥 크듯이 우리 집 책들도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겠다. 제목만 보고도 글쓴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대부분의 수필집과 그 속에 담긴 생활의 철학을 다시 읽어보며 어리석은 미망에 빠지지 않도록 삶의 지혜를 배워야겠다.
( 2013년 계간수필 봄호 )
'나의 글모음 > 수필집 ( 인연의 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언의 성지 (0) | 2014.03.05 |
---|---|
삶의 여정 喜, 怒, 哀, 樂 (0) | 2014.03.04 |
인연의 끈 (0) | 2014.03.04 |
노인 자격증 (0) | 2013.08.31 |
복병 (0) | 2013.06.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