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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삭정이의 울음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12.

삭정이의 울음

 

 

  한밤중에 울음소리 때문에 눈이 떠졌다. 잠결에 들린 소리는 분명히 누군가 애절하게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였는데, 이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누가 이 밤중에 울고 있던 것일까. 아파트의 아래층이나 위층에 아픈 분이 계시는 것일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여 봐도 남편의 코고는 소리 외에는 고요한 정적뿐이었다.

 

  하릴없이 거실로 나와 외국에 나가있는 딸애 방을 열어본다.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가 없는 빈방의 썰렁함이 잠옷 사이로 선뜻하게 와 닿는다. 이어 얼마 전까지 어머니가 머무르셨던 작은 방을 열어본다. 통증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이루시던 어머니도 한 달 전쯤 남 동생네 집으로 가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잠결에 들은 서럽도록 처절한 울음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난걸까. 달아난 잠을 다시 불러오기엔 너무 생경스러워 자리에 눕는 것을 포기하고 지난 추억에 빠진다.

 

  어린 시절 겨울방학을 해서 시골 큰집에 가면 나는 밤이 되는 게 너무도 싫고 무서웠다. 낮에는 그런대로 새로운 환경이 신기해서 재미있게 뛰어 놀다가도 밤이 되면 잠은 안 오고 문풍지 밖으로 들리는 소리들이 너무 무서웠다. 낙엽 되어 떨어진 가랑잎의 서걱거리는 소리는 누군가 나를 잡으러 오는 발자국 소리같이 느껴지기도 했고, 마른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윙윙거리며 우는 소리는 꼭 누군가 흐느껴 우는 울음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오래 잊고 있던 공포감을 다시 느낀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동안이었다. 자꾸 쇠약해지시는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온 뒤로는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옆방에서 문을 열고 누었다가도 어머니의 신음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어느 때는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가슴을 파고들어 너무도 힘든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러다가 당신이 그렇게 원하던 아들네 집으로 돌아간 뒤에 어머니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엊그제 뵙고 온 어머니는 마치 바람에도 날아갈 것 같은 마른 삭정이 같았다. 병고 때문에 퉁퉁 부어있던 다리는 신기하리만치 물기가 빠져서 뼈에 가죽만 입힌 듯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런데다가 통증 때문인지 가슴에 맺힌 한(恨) 때문이지 어머니는 꺼이꺼이 울음을 토하셨다.

 

  아무리 자식이라 한들 팔십 평생 맺힌 어머니의 한을 어찌 짐작인들 하겠는가. 삼십여 년 전에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고 손자를 키우며 외롭게 사셨는데, 모두 제 잘난 줄만 알고 바쁘게 사는 자식들이 어머니의 외로움과 한을 알려고 들기나 했을까. 하기 좋은 핑계로 그것은 어머니의 팔자요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했다.

 

  그러나 엊그제 다시 들은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듣던 마른 삭정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내가 추는 살풀이 가락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한 맺힌 음률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오늘밤 내가 들은 울음은 어쩌면 나의 환청(幻聽)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머니가 이승에서 머무르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으로 느낀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어머니와 이별해야 할 날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어머니께 아무것도 해드릴 것이 없음이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다. 난 어릴 적부터 맏이여서 그런지 어머니의 기대와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내가 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그리고 좋은 직장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언제나 맏이를 대견해하고 미더워하셨다.

 

  그리고 가정을 꾸리고 남매를 낳아 기르는 내게 어머니는 언제나 버팀목처럼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런 어머니의 흐뭇한 미소를 보는 것이 나에겐 열 마디 칭찬보다 기뻤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미소는커녕 한 맺힌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머니를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가 없다. 상실감보다는 슬픔이 더 크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머니와 같은 세상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어느덧 해가 바뀌고 정해(丁亥)년 새날이 밝은지도 며칠이 흘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유장한 세월 속에서 지내온 그날이 그날이지만, 그래도 스러지는 것이 있으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새해 새봄에 희망을 품어본다. 아직은 땅 밑 얼음도 그대로이고, 마른 나무들의 모습도 앙상하지만 머지않아 봄은 올 것이다.

 

  얼마 후면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立春)도 코밑으로 다가 올 테고,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우수도 다가오리라. 그때는 정녕 애끓는 삭정이의 울음도 그치고 희망의 노래만을 부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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