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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중학동의 추억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8.

중학동의 추억

 

 

  지하철역에서 나와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조금씩 달라지긴 했어도 모두 예전대로 낯익은 풍경들이다. 안국동의 정겨운 골목이며, 조계사 쪽의 불교용품을 하는 곳들도 모두 그대로이다. 신호가 바뀌고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너 조금 걷다보니 눈에 익숙한 한국일보가 나온다. 이 건물 라운지에서 열리는 후배의 등단 축하연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이 동네를 나와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연회장에는 벌써 선생님을 비롯하여 반가운 선후배들의 얼굴이 많이 보인다. 주인공 H씨는 화사한 얼굴에 더 없이 고운 자태로 부군과 함께 나란히 앉아 있다. 손님들은 글벗뿐 아니라 가족 친지를 비롯하여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러 오신 것 같았다. 아름다운 꽃바구니 사이로 기쁨에 들떠 있는 주인공을 보고 있자니, 그 자리에 앉아서 등단 축하연을 치르던 선후배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 중에는 9년 전의 내 모습도 들어 있다. 초여름이라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긴장을 해서인지 흘러내리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얼떨떨해 있던 순간이었다. “등단이란 글을 잘 써서 치르는 의식(儀式)이 아니라 앞으로 열심히 잘 쓰라는 의미” 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그때는 왜 그리 떨리고 긴장이 되던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자격도 없는 사람이 큰 상을 받은 양 그저 부끄럽고 모든 분들께 고마웠다. 그리고 그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좋은 글을 써서 선생님과 문우들에게 꼭 보답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 한국일보에서 이정림 선생님을 만난 것은 1990년 초겨울이었다.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선생님의 수필 강좌를 듣게 되었는데, 핵심을 찌르는 날카로운 강의와 도도하리만큼 이지적인 모습에 끌려 선생님과 제자로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때는 선생님도 젊으셨기 때문인지 수업 방식도 매우 엄격했고, 무엇보다 우리가 써낸 글에 대한 평도 혹독했다. 어느 때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큼 혹평을 듣기도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그런 시련들이 입에 쓴 보약처럼 내 수필 공부에 도움이 되어준 것 같다.

 

  특히 선생님은 “글은 곧 사람이다. 그러기에 좋은 글은 쓰려면 무엇보다 인간(人間)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행여 어느 회원이 철없이 행복한 자랑이라도 늘어놓게 되면, “무엇 때문에 굳이 골치 아픈 글을 쓰려고 나왔느냐”며 직언(直言)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농담처럼 수필 반에 나오는 것을 “도(道) 닦으러 간다.”고 빗대어 말하기도 했다.

 

  수필은 자기의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접목시키는 문학이다. 수업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읽으며 남의 인생 경험과 그들의 철학,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수필 공부의 또 다른 수확이었다. 그 즈음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수필 공부를 하러 나올 수 있는 여러분은 모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그 당시는 그 말에 별로 수긍이 가기 않았다. 수필 공부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 했는데 지나고 나니 정말 그때가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에는 회원들도 별로 많지 않아서 모두 한 식구처럼 가깝게 지내곤 했다. 수업이 끝나고 자주 들르던 ‘하얀 집’에 모여 칼국수를 먹으며 수업 시간의 후일담을 나누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건물이 낡고 비좁기는 했지만 마치 시골집의 사랑방같이 스스럼없는 곳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후후 불어가며 먹던 칼국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가끔은 근처에 있는 화랑에서 전시회를 감상하거나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일도 있었는데, 마치 아이들처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다니던 즐거운 일들이 이제는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어느덧 선생님을 만난 지도 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세월이 흘러 제자들도 나이를 먹었지만 젊고 팔팔하시던 선생님도 이제는 많이 부드러워지시고 약해지신 것 같다. 더구나 오늘 등단 축하연에서 눈물을 보이시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물론 애써 가르치신 제자가 등단을 하니 대견하고 기뻐서 흘리신 눈물이겠지만,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수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고, 수필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은 선생님이다. 그리고 수필이 힘들어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던 나에게, 등단(登壇)이라는 계기를 통해 글쓰기에 용기를 주신 분도 선생님이다. 그런 선생님께 보답하는 길은 좋은 글을 열심히 쓰는 일뿐이리라. 그러다 보면 언젠가 보잘것없는 내 삶이 수필의 글밭에서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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