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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닫힌 공간 속에서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12.

닫힌 공간 속에서

 

 

  며칠 동안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수확을 앞둔 계절을 시샘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러 곳에서 많은 비 피해가 났다고 한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도 많이 내려가고 낙엽이 지면서 가을이 깊어지리라. 우중이라도 찬거리는 사와야 될 것 같아 현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우리 집이 아파트 십일 층 이어서 걸어 내려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닌다. 위 층 어디에서 누군가 동행을 기다리거나 짐을 싣는지 승강기는 몇 분 동안이나 한곳에 멈춰있다. 예전 같으면 짜증이라도 났으련만 오히려 동행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얼마 전에 우연히 엘리베이터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 사고라고 까지 할 건 못되지만 아무튼 많이 놀라고 당황했다. 그날은 기분도 우울하고 몸도 찌뿌듯하여 뜨거운 물속에라도 있을까 하고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가는 길이었다. 평소에는 일 층 출입구에서 계단을 이용하여 지하에 내려갔는데 그날은 그 빌딩 삼 층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다.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가 두어 층 내려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덜커덩 소리를 내며 아래로 곤두박질을 쳤다. 그러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전이 되며 칠 흙 같은 어둠 속에 혼자 갇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고 다친 곳은 없는지 내 몸 여기저기를 만져 보았다.

 

  다행이 엉덩방아를 찧은 것 말고는 괜찮은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고 비상벨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비상벨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 계속 눌렀으나 통 응답이 없었다. 나중에는 있는 힘을 다하여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빌딩에는 장사라 잘 안 되는지 이삼 층 대부분이 비어 있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는 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뿐이고 그나마 출입구가 엘리베이터하고는 떨어져 있어 일부러 오지 않고는 왕래가 뜸한 곳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겁이 나고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나 혼자 여기 떨어져서 방치되어 있어도 아무도 모르고 지나는 건 아닐까. 그러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어떡하나,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아래로 더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등 머리는 온갖 상상으로 터질 것 같았다. 기계에서는 계속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나며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소리를 지르다가 지쳐서 주저앉아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러대도 밖의 인기척은 나를 외면하고 멀어져 갔다.

 

  그러기를 반복하다가 간신히 관리인과 인터폰이 연결되었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문을 열려고 애를 쓴 시간이 이십여 분되었고 지하 일 층에서도 반쯤은 더 내려간 엘리베이터의 문을 비집고 구출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는 늘 타던 승강기가 어느 때는 괴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사는 곳이 아파트이니 그것을 외면할 수도 없어 한동안은 무척 곤욕스러웠다. 사람은 다행히 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어 이제는 불안감이 거의 없어졌지만 혼자 타는 것보다는 동행이 있는 것이 훨씬 든든하다. 혼자 추락하여 빛도 한줄기 없는 어둠 속에서 불안에 떨던 마음은 무인도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지난 해 가을 우리는 큰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 삼십여 년 간 다니던 직장에서 구조 조정으로 퇴직을 당한 것이다. 더구나 직장의 업무 관계로 보증을 서주었던 후배가 부도를 내고 쓰러지는 바람에 모든 책임을 남편이 대신 지게 되었다.

 

  전 재산을 털어 일을 수습하면서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현실에 부딪히며 꿈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면서 나는 심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마치 넓고 평탄한 길을 걷고 있다가 나 혼자 절벽 밑에 있는 캄캄한 계곡으로 추락한 느낌이었다. 한줄기 빛도 없고 가늠할 수도 없는 계곡은 끝도 없이 깊은 것만 같았다.

 

  그저 살아 갈 일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했다. 마치 엘리베이터 속에서 떨고 있던 때처럼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생각에 외롭고 무섭기만 하였다. 다행히 부모님의 도움으로 거처를 마련하면서 가느다란 희망의 빛이 보였으니 앞으로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내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비는 아직도 기세를 꺽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나무 가지 끝에 앉아 비를 피할 수 있는 둥지도 없는 새를 보면서 그래도 나에게 비를 피할 수 있는 둥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질 뿐이다.

 

                                                                                                                                                         2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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