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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추억의 목소리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12.

추억의 목소리

 

 

“찹쌀떡~ 메밀묵~” 오늘도 어김없이 구성진 목소리가 불야성을 이룬 아파트 숲을 맴돌고 있다. 작년 겨울 맨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었다. 우렁차면서도 어딘가 설움을 가득안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의 톤이나 색깔이 어쩌면 삼십년 전하고 그리도 비슷하던지 어느 집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소리로 착각하였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확실해 지면서 나를 감동시키고 말았다. “어머 어쩌면 요즘도 찹쌀떡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더구나 메밀묵까지도… .” 나는 반가움에 당장 뛰쳐나가 보고 싶었지만 늦은 시각이라 궁금해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가끔 겨울밤의 찬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찹쌀떡 장수의 목소리는 일상에 찌든 나를 향수에 젖게 하였다.

 

  전에 살던 주택가에서는 하루 종일 확성기를 대고 떠드는 상인들 목소리에 음악한번 제대로 들을 수 없다고 진저리를 냈는데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난후로는 관리실에서 잡상인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때문인지 무엇을 사라고 외치는 소리는커녕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별로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간교한 동물인지 산처럼 쌓이는 수북한 신문지를 버릴 때마다 “고물 파세요, 고물”하며 짝 짝 가위질을 하던 고물장수의 목소리가 아쉬워 지기도하고 오늘은 무엇을 해먹을까 하고 막막해질 때 “파삭 파삭 햇감자가 한관에 삼천 원”하던 단골 야채트럭의 확성기 소리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별로 살 것이 없어도 일단 그 소리를 듣고 지남철에 이끌리듯 야채트럭 앞으로 나가면 몰려든 아낙네들에게 들은 정보로 그날의 메뉴는 정해지기 마련이다.

 

  요즘 찹쌀떡을 팔러 다니는 사람은 옛날처럼 고학생일까? 아니면 직업적인 상인일까? 요즘도 메밀묵을 사먹는 사람들이 있으며 또 맛은 어떨까?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출출하다는 아들을 앞세워 찹쌀떡을 사러 내려갔다. 그러나 정작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 채 덜렁 받아든 찹쌀떡은 조금은 굳고 밀가루 냄새가 나서 볼품도 맛도 없는 것이었다.

 

  어느 선전 문구처럼 “고향의 맛”을 기대하였던 나는 변해버린 입맛을 탓하며 나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 내가 살던 집은 좁은 터에 몽땅 건물을 앉힌 일본식 목조이층집이었다. 일본인들이 지어서 살다가 버리고 간 적산가옥을 먼저 주인이 불하받은 것인지 삐꺽거리는 좁은 층계를 올라가는 이층 내방에는 다다미가 깔려있어서 아주 추운 겨울에는 사용을 못하고 텅 비워놓았다.

 

  여러 식구가 복작거리는 아래층에서 겨울을 지내다가 고즈넉한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는 코끝이 빨개지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먼지 냄새가 매캐한 나의 방에서 밤이 깊도록 책을 읽었다. 그때 “메밀~묵 찹쌀~떡”하며 묵자와 떡 자를 길게 늘여 뽑아 구성진 가락을 만드는 목소리를 들으면 입에 군침이 스르르 돌며 책고 눈에 들어오지 않아 달랑거리는 지갑만 만지작거리기 일쑤였다. 대신 “쇼빵이요 쇼빵”하며 쇼에 원한을 풀기라도 하듯 힘주어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 구수한 빵 냄새가 날 것 같아 창문을 열고 내려다본다.

 

  어떻게 금방 알아 차렸는지 귀 덮개가 달린 군용 모자를 쓴 아저씨가 “쇼빵 드려요?” 하고 올려다보면 “아저씨 조금도 팔지요?”하고 소쿠리에 줄을 매어 돈을 내려 보낸다. 아저씨가 “많이 주었다.”하며 소쿠리에 빵을 담아주면 나는 행여 식구들이 알새라 낚싯줄을 올리듯 조심스럽게 끌어올린 다음 미군 부대에서 흘러 나온듯한 식빵 조각들을 씹어 먹는 맛이란 요즘의 피자파이나 초코렛 맛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이제 겨울은 가고 싱싱한 봄이 왔다. 그러나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찹쌀떡 소리는 떠나지 않고 우리의 잃어버린 추억을 강요하고 있다. 세월의 마술은 견디기 힘들었던 아픔이나 수치마저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추억으로 둔갑시켜 피곤한 우리 삶에 싱그러운 청량제가 되어준다.

 

  회색 콘크리트 숲 속에 갇혀 살면서 황폐해진 심성과 고슴도치모양 자기보호를 위해 급급했던 이기적인 마음들을 추억의 봄비로 씻어 내고 싶다. 이제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나면 파란 풀포기들은 더욱 힘차게 움을 틔우고 녹색의 아우성은 일제히 목청을 돋우리라.

 

  갈증을 달래주는 돌샘의 약수처럼 추억의 목소리는 피곤에 지친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위안이 되어준다.

 

                                                                                                                                                             199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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