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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감사하는 마음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12.

감사하는 마음

 

 

  시내에 나가기 위해 오랜만에 버스를 기다렸다. 집 근처에 지하철역이 가까이 있어서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오늘은 피곤하기도 하고 약속시간도 넉넉하여 좌석 버스를 타기로 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삼십분쯤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아 지하철을 타려고 막 걸음을 옮기는데, 그 때야 버스가 도착하였다.

 

  한낮이어서인지 버스 안은 한가로웠고 냉방 시설이 잘되어 있어 분위기가 편안하고 쾌적하였다. 예전에 타던 입석 버스와는 큰 차이가 있어 이제 대중교통 수단도 많이 발전되었구나 싶었다. 오늘은 운전할 일도 없으니 느긋하게 창밖의 거리 풍경을 내다보고 모처럼 옛 생각을 하며 상념에 빠져 있었다.

 

  버스가 한참을 달리다가 어느 정류장에 정차를 했을 때, 나이가 많으신 아주머니 한 분이 버스에 올랐다. 그 부인은 미처 차에 오르기도 전에 “아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하더니 차에 타고 나서도 계속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 부인이 누구에게 왜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지 어리둥절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기사는 물론 아무도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모두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 부인은 그저 고마운 표정으로 빈자리를 찾아가 앉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저분이 그토록 감사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처럼 오래 기다리다가 지쳐있던 차에 버스가 도착하니 그저 반가운 마음에 생각 없이 한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 부인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 간절하고 진지해 보였다. 그때부터 나의 상상은 날개를 달고 한없이 펼쳐졌다.

 

  혹시 가족이 병원에 누어있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소중하게 감싸 안은 보따리 속에는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들이 담겨 있을 지도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해 따뜻한 음식을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은 늦게나마 와 준 버스가 그저 고맙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분의 행색으로 봐서 손쉽게 택시를 이용할 형편은 안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 버스 회사들의 횡포로 배차 시간이 잘 지켜지지도 않고 수익성이 적은 노선은 그나마 운행을 중단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적은 있다. 어떤 사람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화가 나고 오기가 생겨서 자가용을 샀다는 사람도 있고, 버스가 늦게 와서 중요한 약속에 낭패를 본 친구도 있었다. 간혹 그런 말을 들어온 터라 시간을 지켜야 할 약속이 있거나 급한 볼일을 보기 위해서는 아예 지하철이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그러다가 관절염으로 다리가 편찮으신 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건강하실 때는 자주 우리 집에 오셔서 살림 간수도 해 주시고 아이들도 돌보아 주시던 어머니가 몇 년 전부터는 잘 오시지 못한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불공을 드리려 자주 찾던 절이나 친구 분네도 마음대로 다니시질 못한다. 자식들이 모셔오려도 해도 생업에 바쁜 아이들에게 누가 될까 마다하시고, 택시를 타고 오시라고 해도 택시비가 아까워서 엄두를 못 내신다.

 

  친정 근처에 지하철역은 있으나 계단을 오르내리며 몇 번씩 전철을 갈아타야 하는 일은 노인들에게는 큰 부담 일수밖에 없다. 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할 때면 훌쩍 나서고 싶어도 참고 계신다는 어머니 말씀에 나도 가슴이 답답했었다. 어머니가 그나마 외출하실 때 이용하시는 것은 주로 좌석버스다. 우리 집 방향으로 오는 좌석 버스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시던 말씀 도 생각난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입장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아직 다리가 건강하니 지하철을 타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 급할 때는 택시나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으니 버스가 그리 고맙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처럼 다리가 불편하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버스가 외출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일 것이다. 어쩌면 그 부인도 그랬는지 모른다.

 

  이유야 어떠하던지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일은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겉치레가 아닌 진실로 감사하는 마음은 겸손하고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더러는 차가 늦게 왔다고 짜증을 내거나 기사에게 호통을 치는 사람들도 흔치 않게 보았는데, 그 부인의 행동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만약 내가 그런 입장이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부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성난 사람처럼 무표정한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차례로 돌아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삭막하고 건조한 마음을 지녔는지 잘 느끼지 못하는가 보다. 그리고 얼마나 자기 위주의 편협한 틀 속에 갇혀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오늘 그 부인의 행동을 보고 무엇인지 모를 따뜻한 기류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깃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97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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