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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새해를 맞으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8.

새해를 맞으며.....

 

 

  날씨가 잔뜩 흐려있다. 회색 하늘은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이 낮게 가라앉아 오늘따라 마음까지 을씨년스럽게 한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올해도 끝나고 또 새로운 한해를 맞는다. 어느덧 중년에서 노년으로 치닫고 있는 나에게 해가 바뀌고 새해가 오는 것이 새삼스레 감격스럽거나 의미 있는 일도 아니련만, 이맘때면 습관처럼 찾아오는 회한(悔恨)때문에 마음이 우울해진다.

 

  젊은 시절에는 세모(歲暮)가 되면 년 초에 계획했던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반성하거나 후회하기도 하며 새해에는 다시 알찬 목표를 세우며 자신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짧다고 느껴지던 어느 날부터 그런 일들이 한낮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이가 든 만큼 감정도 무디어지고 의욕도 줄어들어서일까.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기 보다는 그저 지금 내게 있는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몇 해가 더 바뀌고 세월이 가면 그 소중한 것들도 하나씩 둘씩 버려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버려야 하는 아픔과 상실감을 통하여 비로소 편안함을 맛볼 수 있는 때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손안에 꼭 쥐고 싶어도 어느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세월의 흐름처럼, 그것은 우리가 점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사실을 터득해 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며칠 전, 어느 문학회의 연말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잘 뵙지 못하던 선후배님들을 만나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뵙지 못하던 선배 한 분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 자리에 나오셨다. 건강이 나빠져서 몹시 고생을 하신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던 터라, 오래간만에 모습을 뵈니 너무 반가웠다. 그 선배님은 몇 번의 수술과 오랜 지병으로 고생을 하고 계셔서인지 앉아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문우들이 반가워 잠깐 나오셔서 그동안의 근황을 말씀하시는데, 듣고 있던 나는 저절로 눈시울이 시큰해 왔다.

 

  그 선배님이 투병 중이던 몇 년 동안은 자신이 좋아하던 모든 것을 하나씩 버리는 과정이라고 하셨다. 좋아하시던 글을 쓰거나 읽는 것도 힘들었으며, 가끔 다니시던 산행도 포기하셨다고 했다. 즐겨하던 음식이나 기호품도 끊거나 절제를 해야 했으며, 친구를 만나거나 사람을 만나는 일도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고 하셨다.

 

  좋아하던 것들을 하나 둘 포기하는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처음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생겼을 것이고, 자신에 대한 비관(悲觀) 때문에도 많이 괴로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 모든 것들에 집착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고 마음을 비워야 살수 있다는 지혜를 터득하신 것 같았다.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하나하나 버림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흔히 “욕심을 버렸다” 라던가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아주 쉽게 쓰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기만 하던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물욕이나 소유욕을 버리는 일은 정말 낙타가 바늘 구명을 들어가는 일처럼 어려울지도 모른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마음자리라는 것이 한번 비워놓으면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 물독 같은 것이던가. 죽을힘을 다해서 겨우 마음 한켠을 비웠다 싶으면, 어느새 욕심으로 가득 채워져서 자신을 괴롭히던 일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그것은 어쩌면 수도자와 같이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평화일지 모른다. 그 선배님의 부인도 여러 가지 지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어느 명상단체를 통하여 버리는 연습을 하고 난 후, 마음도 편해지고 병세도 많이 좋아졌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일은 우리의 심신을 맑게 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인 것 같다.

 

  나도 새해에는 무엇을 이루려는 욕망이나 바램보다는 내 안에 가득 들어있는 이기와 집착, 그리고 헛된 욕심들을 버리려고 노력 할 것이다. 그리하면 내 마음에 평화가 깃들 것이고, 그나마 나를 찾아온 작은 인연에도 감사할 줄 알고 성실해 질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내 이기와 욕심으로 인해 상처를 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도 용서를 구할 수 있으리라.

 

  그 동안 무엇인가 채우고 많이 얻고자 하던 삶이었다면, 새해에는 그 어리석음에서 놓여나서 편안해지고 싶다. 그래서 많이 버림으로서 얻게 되는 기쁨들로 내 마음을 출렁이게 하고 싶다.

 

                                                                                                                                                               20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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