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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바람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8.

바람

 

 

  오랜만에 나와 본 마로니에 거리는 마치 신들린 몸짓처럼 바람 속에 휘말려 있었다. 옷깃을 마구 헤집고 들어온 바람이 작은 흥분으로 데워진 나의 가슴을 조금은 식혀준다. 나를 여기까지 나오게 한 용기도 저 바람 탓은 아닐까? 엉킨 실타래처럼 가슴속에 쌓이는 감정들을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욕망 일뿐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말을 잘 못하는 나는 매끄럽게 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다.

 

  오늘, 가슴으로 느끼는 절실한 이야기들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은 갈망 때문에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다. 샴푸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날씬한 아가씨들이 긴 머리를 마구 휘날리며 자신 있게 걸어간다. 나도 저렇게 자신 있게 의욕에 넘치던 때가 있었을까? 나는 점점 사는 것에 자신이 없어진다. 악착스럽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아내 노릇도, 입시 비상이 걸린 듯한 교육 현실에서 두 아이를 잘 키워내는 엄마 노릇도 점점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당당하게 사회인으로 한 몫을 해내는 친구나 자기희생을 마다 않고 사회봉사를 하는 이웃들을 보면 나는 무엇일까? 라는 회의마저 든다. 하지만 당당하고 자신 있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엷은 배반감과 좁혀질 수 없는 벽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아집으로 꽉 차버려서 남의 이야기는 들어줄 여지가 없는 것 같아서이다.

 

  십여 년 전 가을, 그날도 그렇게 바람이 불었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수술대 위에 눕혀놓고 서울대병원을 미친 듯이 뛰쳐나온 마로니에 거리는 온통 잿빛으로 ‘폭풍의 언덕’ 을 연상케 했다. 아이의 고통을 아무 것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가슴을 난도질하고 왜 하필 우리에게 이런 불행이 왔는가하는 분노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와 더불어 나의 인생도 패배하고 말았다는 절망감에 사람들과의 단절까지 겪으며 겨울 내내 살을 도려내는 황량한 삭풍이 내 가슴에 불었다. 그 이듬해 따뜻한 하늬바람을 타고 봄이 오면서 “신은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주신다.” 라는 말처럼 나는 고통을 직시 할 수 있게 되었고 서서히 절망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었다. 고통을 가져본 자만이 진정한 기쁨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는 그 동안 나와 내 가족 외에 모르고 살아왔던 편협한 시각에서 차츰 따뜻한 눈으로 이웃을 볼 수 있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여러 가지 큰바람이 불고 있다. 모두 다 자기의 몫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여러 가지 돌풍을 일으키고 간혹은 태풍이 되어 많은 것을 파괴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사람들은 은연중 그런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자신을 어떤 열정에 휘말리게 할 것을 은근히 기다리는 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랬다. 어떤 커다란 바람이 불어와 일상에 묻혀 무감각해진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활기찬 의욕을 부채질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행여 그런 바람이 불어올라치면 꼭꼭 옷깃을 여미고 방어할 자세만 취했지 가슴을 열 준비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를 휩쓸어 갈 만큼 큰 위력의 태풍만이 바라던 바람은 아닐 것이다. 길가의 풀꽃들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실바람도, 뛰노는 아이들의 이마를 간질이는 미풍도, 고된 노동을 끝낸 소시민의 땀을 식혀줄 한줄기 바람도 정말 소중한 바람이라는 것을.....

 

  아무런 재주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삶의 전쟁터에서 지쳐 들어오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고 삶에 지친 여러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는 잔잔한 솔바람이 되고 싶다. 삭막한 가슴을 여미고 사는 사람들의 가슴속을 가만히 파고 들어가 따뜻한 사람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

 

  그래서 그 바람이 여러 사람에게 전염되고 퍼져서 조용하지만 점점 더 크게 번져 가기를 바란다. 초록의 아우성으로 춤을 추는 가로수들이 나에게 속삭인다. 부디 용기를 잃지 말고 가슴을 쭉 펴고 힘차게 걸어 보라고.....

 

                                                                                                                ( 1989, 5 전국 주부백일장 차석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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