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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소리로 어둠의 빛을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4.

소리로 어둠의 빛을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어느 시각 장애자의 음악세계를 다룬 프로를 보았다. 빛을 볼 수 없는 여건에서도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며 많은 곡을 만들어 세계 음악제에 출품하여 수상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무심코 화면을 보다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청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수필공부를 마치고 선배 한 분과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전철에서 가끔 볼 수 있듯이 앞을 못 보는 청년이 구걸을 하러 다니는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모니카나 노래도 부르지 않고 대신 가슴에 커다란 선전용 판넬을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것을 읽어보니 음악당 건립을 위한 기금을 모금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러자 흑백사진처럼 오래 전 어느 잡지에서 읽었던 여인의 수기가 떠올랐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 하나를 두고 남편을 잃었는데, 그 아들마저 백일을 갓 넘기자 시력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그 여인은 생계를 위하여 일하러 나가야만 하는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밖에서 자물쇠로 문을 잠그고 행상을 나서곤 했다고 한다.

 

  대신 아이가 있는 방에는 하루 종일 먹을 것과 장난감으로 소리 나는 공을 놓아두었다고 했다. 어린것을 혼자 놔두고 발걸음을 떼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러나 아이는 청각이 발달해서인지 점점 음악적인 재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여인은 아들의 재질을 키워주려고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동분서주하며 아들의 음악 활동을 위하여 역경을 이겨나가는 눈물겨운 내용이었다.

 

  그 청년을 보자 어쩐지 예전에 읽었던 그 여인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아이가 이렇게 청년으로 컸다면 대견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는 살그머니 지갑을 열고 돈을 꺼내려는데 그 청년은 마치 나를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복잡한 인파 사이를 뚫고 내 앞에 와 서더니 “혹시 저에 대한 기사를 본 일이 있거나 들은 적이 있으세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오래 전에 청년 어머니의 글을 잡지에서 읽은 것 같다고 했더니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부탁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승낙을 하였다.

 

  그는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구두를 벗기더니 내 발을 이리저리 만지는 것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기도 하고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그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는 자기의 음악공부에 참고가 되고 도움이 필요해서 그렇다며 조심스레 내 발등에 올라앉더니 나에게 박자를 맞추듯 두 발을 움직여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들 또래의 청년이 창작에 필요하다고 해서 거절은 할 수 없었지만 전철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해괴한 행동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당장 그만두라며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이십여 분이 나에게는 두 시간도 넘게 느껴졌다. 내가 왜 주제넘은 동정심에 이런 곤욕을 치를까 하는 후회도 막심했다.

 

  그러나 나로 인해 이 청년이 새로운 충동이나 영감을 얻어 훌륭한 곡을 만들 수 있다면 수치스럽더라도 참아보자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음악도 물론이거니와 모든 예술창작은 피나는 고통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도 그 청년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봐도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잊고 있던 일들이 오늘 텔레비전 화면을 통하여 다시 다가온 것이었다. 그 청년은 32 현의 가야금을 만들어 창작 생활에 몰두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음악적인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음악당을 건립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고 있었다. 하물며 지하철에서의 모금운동도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소리로 감동을 주는 음악을 만들어 어둠 속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화면을 보면서 그날 전철 안에서 창피하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내가 부끄러워했던 행동들이 정말 그에게 음악적인 자양분이 되어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음악을 잘 이해 못하는 나에게도 보람으로 남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아들의 음악활동을 위하여 이리저리 뛰며 고군분투하는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훌륭한 아들 뒤에는 훌륭한 어머니의 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라는 자책감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199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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