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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군살을 빼야지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4.

군살을 빼야지

 

 

  언제부터인가 체중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오십이 넘고 나서는 한계에 도달했는지, 오늘은 의사 선생님이 건강을 위하여 체중을 줄이라고 충고한다. 나는 처녀 때부터 가냘픈 몸매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살이 찐 것은 아니었지만, 동네 어른들이 보시면 복스럽게 생겼다느니 맏며느리 감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하셨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나는 아무거나 잘 먹었다. 처녀 시절 남편과 연애를 할 때도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가난한 애인에게 별로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내 손으로 음식을 장만하다 보니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허리둘레는 조금씩 늘어갔다. 게다가 살이 잘 찌는 체질인지, 운동도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부단한 노력을 해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하기는 남편은 세 끼니를 꼬박 챙겨 먹고 술까지 좋아하는데도 살이 별로 찌지 않는 것을 보면 조금은 억울한 생각까지 든다. 아무리 변명을 해봐도 남편의 지론대로라면 먹은 것만큼 에너지를 소비하지 못하니까 남는 것이 축적되어 지방이 되는 것이라니 할 말이 없다. 내가 게으르거나 식욕을 참지 못하고 과식(過食)을 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친구 부부와 배나무 과수원에 다녀온 일이 있다. 과수원이야 친구네 것이지만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남에게 맡겼으니 가서 먹을 거라도 따오자고 떠난 길이었다. 우리가 떠난 날은 하늘이 쪽빛으로 파랗고 상큼하게 맑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모처럼 도심을 벗어나 누렇게 익은 황금 들판과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는 산야를 바라보며 달리는 기분은 몸도 마음도 날아갈듯 상쾌하였다.

 

  과수원에 도착하니 모두 외출중인지 관리인이 살고 있는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산 위에 지어놓은 평상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산길로 올라가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밤송이들이 맘껏 여물어서 저절로 떨어진 밤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공기 좋은 곳에서 점심이나 맛있게 해먹고 배나 몇 개 따오려고 생각했지, 밤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우리는 밥을 해먹을 생각도 잊은 채 “어머나 이 밤 좀 봐.”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밤 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자들이 배가 고프니 식사부터 하자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가져간 고기를 굽고 지지고 하여 모처럼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끝낸 뒤에도 욕심껏 밤을 줍고 배를 따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덧 가을 햇볕이 산 너머로 숨기 시작할 때, 우리는 배낭과 보따리에 가득 담긴 배와 밤을 가지고 산을 내려왔다. 각자 양손 가득히 보따리를 들고 산을 내려오는데, 어찌된 셈인지 우리가 먹은 쓰레기 보따리는 준비해 간 분량보다도 더 커져 있었다. 빈병이나 일회용 용기가 있어서 그렇겠지만, 네 명이 먹고 난 쓰레기의 분량은 실로 어마 어마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배와 밤 보따리에 쓰레기까지 가득 싣고 돌아오는 길은 그리 상쾌하고 즐겁지가 않았다.

 

   모처럼 과식을 한 위(胃)는 소화를 시키지 못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남편은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있었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집에 가져가야 먹을 식구도 없는데 욕심을 부려가며 배를 따고, 밤을 깡그리 주어 온 일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어느 산에서 현수막을 걸어 놓은 걸 본 일이 있다. 거기에는 다람쥐들이 “우리가 먹을 겨울 양식을 남겨주세요”라며 애원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때는 무심코 “사람들도 정말 너무 하네. 동물들도 겨우살이를 해야 될 텐데 밤과 도토리를 다 주어가면 어쩐단 말이야”하고 내가 자연 애호가가 된 듯이 흥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나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남의 잘못은 쉽게 꼬집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의 욕심은 깨닫지 못하니 말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우리 집은, 시골에서 온 손님들로 항상 북적였다. 섬에서 사는 고향친척들이 도시에 볼일이 생기면 여인숙처럼 늘 머무는 곳이 우리 집이었다.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나가시느라 손님들이 오시면 전전긍긍 하셨으나, 할머니는 오시는 친척들을 누구라도 반기셨다. 설사 우리가 먹을 것이 없어도 손님들이 오시면 당장 밥상을 내와야 했다.

 

  그리고 먹다 남은 반찬 찌꺼기는 꼭 모아서 도둑고양이 밥으로 놓거나 개를 키우는 집에 갖다 주곤 하셨다. 그것은 옛 어른들이 까치를 위해서 감 몇 개는 따지 않고 남겨 둔다든지 산짐승들을 배려해서 도토리나 밤을 남겨 놓는 이치와 비슷할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혼자서는 살수가 없다. 서로 나누고 공유해야만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오늘 또 잊은 것이다.

 

  문득 나의 몸에 군살이 붙고 체중이 자꾸 느는 것도 남보다 식탐(食貪)이 많아서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다져먹고 군살을 빼야겠다. 더불어 암 덩이처럼 마음속의 고여 있는 욕심과 미련의 군살도 자라지 못하도록 잘라 버려야겠다.

가을 해는 정말 노루 꼬리만큼 짧아져서 주위는 벌써 어둠 속에 잠기고 있다. 도시로 들어오는 차량의 행렬에는 어느덧 불이 켜지고 꽉 막힌 도로마다 귀가 전쟁으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200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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