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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불씨)

나를 돌아보며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8. 4.

나를 돌아보며

 

 

  며칠째 지독한 감기를 앓고 있다. 처음에는 피곤이 겹쳐서 그렇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기침이 심해지며 병원출입까지 하게 되었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 하다가도 저녁 무렵만 되면 천식환자 같은 기침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결국은 의사의 처방대로 만사를 제쳐두고 며칠 동안 푹 쉬기로 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았지만, 막상 체념을 하고나니 오히려 모든 속박에서 벗어 날수 있었다. 항상 일상에 떠밀려 분주한 생활을 하다가 꼼짝 않고 누워있으려니 뜻밖의 휴가를 받은 듯 마음이 한가로웠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책도 좀 읽고 요즘은 멀리했던 음악도 느긋하게 즐기리란 생각에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도 잠시뿐, 막상 누워있으려니 머리도 아프고 온몸이 쑤시며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소태같이 쓴 입맛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혼자 있으려니, 몸보다는 마음이 지치고 답답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는커녕 멍하니 망상에 잠겨 있다가 잠 속에 빠져들고 꿈인지 환상인지도 모를 나락 속을 헤매 다니곤 했다. 그러다 정신이 들어 눈을 뜨면 벽지의 무늬가 점점 커져서 나를 덮치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래도 건강한 편이지만 어렸을 적에는 병약해서 자주 앓아누웠던 기억이 난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결석을 많이 해서 한 번도 개근상을 타본 기억이 없다. 몸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혼자 누워 있어야 했다. 식구들은 모두 바빠서 아무도 내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온종일 누워서 멍하니 있다가 보면 벽지의 사방 무늬와 천정의 무늬들이 점점 커져서 나를 덮칠 것 같아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내가 기력이 없어 가위에 눌린 것이라며 품에 꼭 안아 달래주시곤 했다.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그 시각적인 현상을 얼마 전에 다시 경험할 수가 있었다.

 

  어느 날 딸아이가 “매직 아이”라는 그림을 가지고 와서 무슨 그림인지 맞춰보라는 것이었다. 얼른 보기에는 마치 색맹 검사를 할 때 쓰이는 책자처럼 조그만 점들로 이어진 그림이었는데, 도무지 짐작이 안 되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슨 그림인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딸아이는 굳이 숨은 그림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림을 있는 그대로 멍하니 쳐다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어떤 형태의 물체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리해도 못 찾겠다고 포기하려던 순간, 언뜻 어떤 영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교묘하게도 두 눈의 시각이 한군데로 모아져 사물이 겹쳐지는 순간에만 보이는, 이름 그대로 요술 그림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나서 그 그림의 실상은 어느 것이고 허상은 어느 것일까라는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내가 어렵게 찾아낸 그 그림이 과연 그것의 실상일지 허상일지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이나 부딪히는 관계 속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당황할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평소에는 잘 알고 있던 것들이 어느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소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더러는 상처를 입기도 하고 배신감에 실망을 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내가 보아왔던 모습들은 내가 만들어 낸 허상에 지나지 않았을까 라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에게 보여 지는 내 모습은 어디까지가 실상이고 어디부터가 허상일까라는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몸이 아픈 탓일까 하루해가 길고 지루하기만 하다. 바쁠 때는 뻔질나게 울려대던 전화기도 오늘은 조용하기만 하고 오늘따라 안부를 물어오는 친구도 없는 것이 못내 서운하기만 하다. “최선을 다하고도 칭찬이 따르지 않는 것은 덕이 없음이요, 진실로 사람을 대한다 하였으나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은 소박하지 못한 탓이다.”라던 어느 분의 말씀이 떠오르며 자신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뒤돌아보게 되었다.

 

  가끔은 분주하고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한없는 고적감 속에서 외로움도 느껴보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일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겸허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그런 하루였다.

 

                                                                                                                                                         199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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