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 되면 물안개처럼 스멀스멀 떠오르는 풍경 하나가 있다.
단풍에 둘러싸인 신비스런 저수지와 몽환적인 물안개에 갇힌 주산지의 고목들이다.
경북 청송군 주왕산 국립공원에 있는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의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친근하고 잘 알려진 곳이다.
더구나 사진촬영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고,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기에 오히려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가을의 주산지는 마음속에 숨겨둔 연인 같아서 몇 년 전 가을, 마음을 다져먹고 주산지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그 근처에 가서 숙소를 정하고 그곳의 정보를 들으니 그때가 단풍 절정기인데다 휴일이어서 엄청난
사람들이 몰릴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다음 날 새벽에 저수지에 올라가도 운이 나쁘면 촬영장소를 확보하지 못해 허탕을 칠 수도 있다고 했다.
일행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는데, 결국은 잠을 포기하고 자정쯤 산에 올라가서 새벽을 맞기로 했다.
우리는 밤을 지새울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저수지에 도착하고 보니 어떤 사람들은 담요를 뒤집어쓰거나
아예 야영을 하면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행이 촬영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남아있어 삼각대를 펼쳐놓고 촬영준비를 끝내자 점점 몸속으로 냉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낮에는 따가운 햇볕 때문에 추위를 예상하지 못하고 얇은 점퍼만 걸치고 길을 떠난 내 불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간 일행들과 실없는 농담도 하고 춥다고 호들갑도 떨면서 추위를 이겨보려고 했지만
깊은 산속의 가을밤은 매서우리만치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 포기하고 산을 내려 갈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저 빨리 해가 떠 주기만을 기다렸다.
제대로 앉아 쉴 공간도 없는 곳에서 암흑속의 저수지를 응시하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누구에게는 고행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성찰의 시간도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밤이 춥고 길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가. 드디어 서서히 여명이 비치며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는데,
그때서야 희뿌연 안개너머로 주위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산은 그대로 거울을 닮은 물 위로 아름다운 반영을 만들고 오랜 세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왕 버드나무의 고목들은 비장한 모습으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
아침 해가 점점 산 위로 올라와서 저수지를 비추자 붉은 빛을 띤 수면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른 물안개가
마치 부글부글 끓고 있는 듯이 보였다.
밤새 추위에 떨면서 기다렸던 호수의 아침은 정말 신비스럽고 몽환적이어서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추운 밤을 기다렸기에 그 아침이 더욱 따뜻하고 찬란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도 어쩌면 그 가을의 아침과 비슷할지 모른다. 춥고 힘들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아무리 밤이 길어도 아침은 밝아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나면 꽃들이 피어나는 인생의 봄은 다시 올 것이다.
< 좋은 수필 >2013년 10월호에 실린 포토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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