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풍경을 소유하다.
해발 1500미터가 넘는 산꼭대기는 의외로 평평했다. 다행이 길이 잘 닦여 있어 꼬불꼬불하게 굽은 길을 차로 오르긴 했지만, 높은 산위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산꼭대기의 대평원은 셀 수도 없이 많은 호수를 품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을 둘러싼 수많은 하얀 설산과 푸른 빙하들이 눈에 띄었다.
그제야 왜 이렇게 높은 산에 호수가 많은지 이해가 되었다. 주위의 설산과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이 평원으로 스며들어 넓은 호수를 이룬 것이었다.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고지대여서 생명력이 강한 고산식물들만 야트막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호수 가에는 그림처럼 예쁜 집들이 띄엄띄엄 눈에 뜨였다.
나무 한그루 없는 허허벌판에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해서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사람이 항상 거주하는 것은 아니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주말이나 휴가 때 이용하는 별장이라고 한다. 아무리 자연을 좋아하고 햇빛을 좋아하는 노르웨이인이라 해도 나무 그늘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산지대에 와서 휴가를 즐긴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곳은 해발이 높아서인지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바람도 강했다. 우리는 놀란 것도 잠시, 드넓은 호수와 설산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기에 바빴다. 어떻게 하면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오랫동안 간직 할 수 있을까 고심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풍경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서 배운 것이 사진촬영기술이다.
젊은 시절부터 조용한 외양과는 달리 방랑기질이 있었는지 난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처녀 때는 물론 임신을 해서 부른 배를 하고서도 여행을 다닌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난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힘들어서 시들해 있다가도 여행계획을 세울 때는 눈이 반짝반짝 해진다고 했다. 젊어서는 전국의 산을 찾아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고, 나이가 들어서는 우리와는 사는 풍습도 다르고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해외여행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항상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카메라와는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대개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찍은 사진들인데, 보통 증명사진이라고 말하는 여행지에 가서 인물을 중앙에 세우고 배경이 조그맣게 들어간 기록 사진들이었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그야말로 사진기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굳이 돈이 드는 필름을 사용하지 않고 인화를 하지 않아도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언제나 꺼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누구나 손바닥 반만 한 가벼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나도 예외 없이 아주 작은 콤팩트 카메라를 가지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으며 페루나 쿠바 등 중남미의 나라들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때 찍은 사진들은 기록사진에 지나지 않을 뿐, 내 생각이 들어 간 사진은 아니었다. 평생 다시 가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여행지에서 찍어 온, 보잘 것 없는 사진을 보다가 제대로 사진을 배워보리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5년 전, DSLR 카메라를 장만하고 사진공부를 시작했다. 무슨 취미이건 처음에는 겁 없이 뛰어들었다가 알아갈수록 힘들어지듯이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주로 풍경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해뜨기 전후 1시간과 해지기 전후 1시간이 가장 빛이 아름다운 시간이다. 그 시간에 맞추려면 캄캄한 새벽에 집을 나가 어둠이 짙게 깔릴 때에야 귀가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더구나 무거운 촬영 장비를 메고 다니는 일도 점점 힘에 부치고, 좀 더 잘 찍고 싶은 욕심을 다스리는 일도 힘들었다. 원래 기계를 다루는 것은 전혀 소질이 없는 기계치에다 컴퓨터 실력도 시원치 않은 터에 사진공부를 하려니 젊은 사람들보다 느리고 힘들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사진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 못지않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찍으러 다녔다.
그리고 무엇이던지 혼자 터득하는 것 보다는 앞서 간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수월하듯이 사진공부를 하며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예술사진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더구나 사진공부를 하던 중에 운이 좋았는지 공모전에서 분에 넘치는 큰 상도 몇 번 받고, 올봄에는 그동안 찍은 작품을 모아 전시회도 열었다. 요즘은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 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수 있기에 사진 인구가 천만이 넘는다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이 들어간 나만의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번 북유럽 여행 중에 국민소득이 10만 불이 넘고 최대의 복지국가로 불리는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무 한그루 없는 고산지대의 외딴집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들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 문명과는 동떨어진 황량한 곳에서 마음을 비우며 생활의 활력소를 충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사는 것이 시들하고 답답해지면 훌쩍 여행을 떠나 다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나만의 소중한 풍경을 소유하게 위해 열심히 사진 촬영을 한다. 그런 과정에서 얻은 활력소는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일상의 윤활유가 되어줄 것이다.
월간< 불교> 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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