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전통이 남아있는 교토의 기온(祇園)
한 향 순
이십 여 년 만에 교토를 다시 찾았으나 느낌은 예전과 전혀 달랐다.
교토는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만큼 옛것이 고스란히 보전되어있는 도시이다.
교토에서도 특히 기온(祇園) 거리는 아사카신사부터 카모강까지 곧게 이어지는 거리로
교토의 옛 분위기를 만끽 할 수 있는 거리이다.
기온 거리 중에 시조도리에서 하나미코지까지의 길로 들어서면 백년이 넘는
목조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골목이 나온다. 오랜 세월을 지켜 온 골목으로 들어서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 마치 내가 그리던 고향 동네에 와있는 듯 착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중학교 때 까지 살던 인천의 한동네도 분위기가 이곳과 비슷했다.
적산 가옥들이 빼곡한 좁은 골목에서 학교를 다니고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으며
다다미를 깐 이층 방에서 추위에 떨며 가족들 몰래 소설책을 보곤 했다.
그러다가 한밤중 식빵이나 찹쌀떡 장수가 지나가면 동생들 몰래 이층에서
바구니를 내려 보내 빵을 사먹곤 했다. 이 골목에는 그때처럼 오밀조밀한 화분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고
복잡하게 얽힌 전신주 사이로 집집마다 자전거가 놓여 있기도 했다.
교토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롭 마샬 감독의 <게이샤의 추억>이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일본사를 공부한 아서 골든이 이와사카 미네코 등
기온에서 게이코로 살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장쯔이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소개되었는데, 주인공인 사유리는 가난한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소녀로,
기온의 '노부 오키야'에서 게이코로 자라난 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격동의 시간과 사랑의 아픔을 겪어간다.
일본 게이샤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대부분의 주연은 중화권 배우이고 미국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게이샤의 길을 가게 된 어린 사유리의 삶과, 게이샤로 살면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교토의 주요 관광지를 돌다보면 영화 속 장면들이 생각나곤 한다.
우리 일행이 교토의 기온 거리를 첫 번째 행선지로 잡은 것은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행여
게이샤라 불리는 게이꼬를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통념과 달리 기온은 홍등가가 아니라 수백 년간 여성 예술인들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거리이다.
또한 교토에서는 게이샤가 아니라 게이코라는 지칭으로 이들을 부른다.
게이샤는 1688∼1704년경부터 생긴 제도로서 본래는 예능에 관한 일만을 하였으나
유녀(遊女)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의 두 종류가 생겼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게이샤는, 문자 그대로 예술가라는 뜻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전문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일본의 상징으로서 후지산, 벚꽃, 사무라이, 가부키 그리고 게이샤를 꼽듯이 그만큼 이들은
일본 문화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일본인조차 가장 일본적인 집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남성들의 향락의 대상인 유녀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과 예술적 재능을 소유한 직업여성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게이샤에 대한 비뚤어진 편견과, 게이샤가 되기 위한 고된 수련을 기피하게 되면서 점차
게이샤의 숫자도 줄어들고 게이샤의 삶도 퇴색해가고 있다.
교토에서 게이코가 되기 위해서는 5년 정도의 혹독한 수련기간을 거쳐야 되는데 수련기간에 있는
어린 처녀들은 마이코라고 불린다.
우리는 그들을 촬영하기 위해 대낮부터 골목에 진을 치고 기다렸으나 게이샤의 복장을
흉내 낸 관광객들만 지나갈 뿐, 정작 게이샤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골목에 어둠이 스며들고 밤이 되자 보따리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서 어느 집으로
쏙 들어가는 게이코들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분장을 끝낸 뒤, 어느 집에 모여 있다가
술집에서 호출이 오면 불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골목이 워낙 어두컴컴한데다 행여 사람들 눈에 띨까봐 빠르게 오가는 그녀들을 촬영하기는 아주 힘들었다.
처음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봤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바로 옆을 지나 멀리로 지나가는
게이샤의 새빨간 입술과 하얀 목덜미는 너무도 신비스러웠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존재를 보는 듯해서 넋을 잃고 쳐다보느라 카메라 셔터를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밤마다 골목에 진을 치고 기다려서야 겨우 몇 장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보자기에 싼 보따리를 가슴에 품고 다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많이 궁금했다.
때로는 아주 앳된 얼굴에 수줍어하는 표정을 짓는 소녀들도 있었는데 아마도 수련과정에 있는 마이코인 듯싶었다.
골목에는 우리 일행뿐 아니라 외국인 사진사들이 그녀들을 포착하려고 무리를 이루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치 먹이를 사냥하려는 무리들 같았다. 내 자신을 비롯하여 “스미마생”이라는 한마디로
그녀들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촬영하는 사람들이 몰상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교토에서 며칠을 머무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닌 여러 관광지중에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기요미즈데라 라고 불리는 청수사이다. 우리는 일반 관광객이 몰리는 낮 시간을 피하려고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에 청수사를 찾았는데, 이날따라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불에 반사된 돌로 된 바닥은 신비스런 분위기로 가득했고 오래 된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은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더구나 한창 단풍이 절정을 이루던 시기여서 빗속에서 처연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던
청수사의 단풍을 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알록달록한 산허리를 휘감은 이른 새벽의 운해는
오래 된 고찰의 산 뒤로 신비스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십 여 년 전, 처음 교토를 찾았을 때는 패키지 관광을 따라와서 아무 느낌 없이 바쁘게
관광지만 돌다 갔는데, 이번 여행은 교토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더구나 게이샤의 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이 잊지 못할 커다란 수확이었다.
2017년 1,2월호 격월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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