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꿈꾸는 바다를 보았는가
한 향 순
어두컴컴한 새벽녘, 차에서 내려 어둠 속 길을 더듬어 드디어 겨울바다에 닿았다.
바다는 푸르스름한 여명 속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삼각대를 펼치고 촬영준비를 했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겠기에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파고드는 매서운 칼바람을 막아야 했다.
어둠속에서 눈이 조금씩 익숙해지자 아주 느린 셔터로 바다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바다 속에 솟아 있는 무수한 바위들이 마치 운해 속에 떠있는 산봉우리처럼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였다.
곧바로 촬영한 카메라의 LCD 모니터를 보니 푸르스름한 어둠속에 휩싸인 바다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느껴졌다. 한참동안 파인더 속의 바다와 함께 나도 몽환의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차츰 어둠이 걷히고 바다에 빛이 들어오자,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것은 바위에 거세게
부딪치는 파도의 환영(幻影)이었다. 파도가 심하게 치는 날, 느린 셔터로 촬영을 하면 파도가
모두 뭉개져서 하얀 안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사실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예술적인 대접을 받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사진이 꼭 사실적이어야 되고 재현의 수단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사진은 보는 예술에서 작가의 의도를 읽는 예술로 변하고 있다.
날이 밝았으나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서 일출을 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대신 우리는 바위에 부딪치는 거센 파도와 흘러가는 구름의 드라마틱한 풍경을 담기 위해
한겨울의 추위도 잊고 촬영에 몰두했다. 겨울이 되면 한해도 빠지지 않고 찾게 되는 이곳은
삼척에 있는 신남항, 갈남항 장호항등 작은 항구들이다. 십 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던 이곳이 요즘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색다른 비경을 찾아 나선 사진가들 때문일 것이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에메랄드빛 바다에 솟아있는 풍경은 어느 바다와도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더구나 물이 어찌나 맑은지 낮게 깔린 바위틈으로 찰랑거리는 물빛을 보면
손을 넣어 만지고 싶다. 특히 우리가 처음 도착한 ‘해신당 공원’ 아래에 있는 신남항의 풍광은
아주 변화무쌍하고 아기자기하다.
날씨에 따라 물빛이 변하고 바람의 세기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해안의 남근숭배민속(男根崇拜民俗)이 전해 내려오는 해신당 공원에는 민망하지만 해학적인
웃음을 짓게 되는 남근조각공원이 있다. 그러나 공원을 따라 펼쳐지는 소나무 산책로와 푸른 신남바다가
어우러진 풍광 때문에 동해안 최대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옛날 신남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처녀, 총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해초작업을 위해 총각은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처녀를 내려주고 다시 오겠다고 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파도와 심한 강풍이 불어 처녀는 바다에 빠져 죽고 만다.
그 이후 이 마을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았는데 죽은 처녀의 원혼 때문이란 소문이 돌았다.
어느 날, 한 어부가 홧김에 바다를 향해 오줌을 쌌더니 어찌된 일인지 풍어를 이루어 돌아온다.
이후 이 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이 되면 나무로 남근을 깎아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남근을 깎아 매달아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신남바다에서 두어 시간 촬영을 마친 우리는 그곳에서 3킬로 정도 떨어진 갈남항을 찾아갔다.
갈남항은 신남항보다 더 작은 포구이다. 아담한 동네에는 흔한 횟집이나 식당도 없고 변변한 가게마저도 없다.
그저 작은 규모의 방파제와 항구가 있고 빨강과 하얀 등대 둘이서 조그만 포구를 지키고 있다.
가끔 양미리를 한가득 잡은 어선들이 들어와 포구 앞마당에 풀어 놓는 날이면 극성맞은
갈매기 떼의 울음소리 때문에 조용하던 포구가 소란스러워 진다.
그러나 마을 끝에 방파제가 둘러진 바다에 서면 어쩜 그리도 바위와 물빛이 예쁜지 누구든지 감동을 하고 만다.
어느 해 겨울에는 바로 바다 앞에 있는 민박에서 묵은 일이 있었는데, 외풍이 어찌나 심한지
일행들은 추위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생을 했다, 그러나 새벽에 바다를 보고 나서는
간밤의 추위는 모두 잊은 듯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봄은 봄대로 물빛이 예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여름바다도 좋지만 그래도 역시 삼척바다는 겨울에 와야 제 맛이 난다.
알싸하게 매운 추위에 물빛이 맑고 투명하며 거센 바람 때문에 거친 파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남항과 갈남항 보다는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탄 장호항은 삼척시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어항이다.
해안선의 풍경이 아름다우며 지형이 수컷 오리를 닮았다하여 장도리로 불리다가 나중에 장호항으로 바뀌었다.
장호항은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릴 정도로 투명한 쪽빛바다와 기암괴석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다.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면 짙푸른 바다와 하늘이 선명한 경계를 만들고 지나가는 고깃배가 길게
포말을 그리며 어디론가 떠난다. 특히 장호항은 수심이 낮고 물이 맑아서 여름이면 스노클링이나
카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요즘에는 캠핑장도 만들어 놓고 관광객들에게
어촌체험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돌섬을 연결하여 만든 예쁜 다리를 지나 전망대에 오르면
어촌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도 있다.
바다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지만, 또한 많은 것을 포용하고 정화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이 들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바다를 찾는가 보다.
모나고 상처 난 마음을 바다에 풀어놓기 위해서이다. 숱한 사람들의 아픈 마음까지 품어주는 바다.
각자 바다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다양한 생각들이 모여 우리도 포용의 바다가 되고 싶다.
2017년 3,4월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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