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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포토기행(길에서 길을 생각하며)

비극을 목격한 다리

by 아네모네(한향순) 2018. 2. 11.



비극의 다리 스타리 모스트

 

                                                                                                                     한 향 순

 

우중충하게 흐린 하늘 사이로 마음까지 가라앉게 만드는 오후, 발칸 여행의 종착지 보스니아에 들리기로 했다.

알프스 빙하가 만든 슬로베니아의 블레드호수를 보고,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 불리는 크로아티아를 돌며 눈을 호사시킨 후,

 별 기대 없이 들른 보스니아에서 깊은 울림을 받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크로아티아에서 보스니아 국경을 넘으며 너무도 다른 분위기에 조금 의아했다.

그러나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모스타르에서 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모스타르 라는 말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짙푸른 네레트바강을 지켜주는 파수꾼이라는 데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스타리 모스트'는 모스타르의 네레트바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오랫동안 끔찍한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져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교 주민과 카톨릭, 동방정교회를 믿는 마을 주민들은 종교는 다르지만

서로를 존중해주며 오랜 세월 사이좋게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 날,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되었고 이웃을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 긴 이름의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서쪽·남쪽 등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헤르체고비나는 좁은 회랑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네레트바 해협과 맞닿아 있다.

발칸의 전쟁은 유고슬로비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티토대통령 시절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6개 사회주의 연방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슬로베니아를 선두로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등 유고연방을 구성했던 나라들이 차례로 하나둘씩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인들이 핍박을 염려해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결국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의 종교전쟁은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를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리는 모스타르에 도착하여 스타리 모스트를 보기 위해 구시가지로 들어섰다.

그런데 거리 곳곳에 총탄을 맞은 건물외벽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니 방치 된 것이 아니라 그때의 긴박하고 잔인했던

순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허물지 않고 보존 하는 듯싶었다. 거리에는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이 뚜렷했다.

건물마다 총탄 흔적이 남아있고 아직도 복구가 덜 된 곳은 빈집들이 유령의 집처럼 곳곳에  서있었다



.

다리로 가는 구시가지는 마치 이스탄불의 바자르를 연상시키듯이 돌을 깐 골목은 크고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제는 관광객들을 위해 앙증맞은 기념품 가게나 예쁜 레스토랑이나 찻집도 생겨나서 조금은 덜 황폐해 보이지만

골목 곳곳에는 탄피로 만든 장식품이나 전쟁을 상기시키는 문구들이 쓰여 있었다.


드디어 진초록의 네레트바강이 보이고 양쪽으로 늘어선 회교식 집들과 동네를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가 보였다.

스타리 모스트는 네레트바 강을 잇는 폭 5미터, 길이 30미터, 높이 24미터의 다리이며 하얀색 돌로 된

 단일 아치형 터키식 다리이다. 이 다리는 네레트바 강에서 폭이 가장 좁은 구역에 설치된 것으로 원래는 나무다리였다고 한다.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문화와 종교가 다른 민족 간 화해와 연결의 상징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알려진

스타리 모스트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세계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특히 유네스코가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하자 세계 각국의 지원이 쇄도했고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잠수부들은 강에 수장된 다리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모두 건져 올렸고 터키의 건축가들은 1,088개의 돌을 꼼꼼히

재배치하여 완벽하게 재건했다. 다리 곳곳에는 ‘Don’t forget ’93...’ 내전의 비극을 잊지 말자는 슬로건이 이곳저곳 눈에 띄었다.




네레트바 강의 깊이는 약 5미터, 수면으로부터 약 18미터 높이에 세워진 다리에서 매년 한 번씩 열리는 번지점프는 이곳의 명물이다.

원래 번지점프는 이곳 남자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매우 신성한 행위로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되어왔다.

특히 그 배경에 있는 스타리 모스트 다리의 아름다움 때문에 해외토픽에 단골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관광용 이벤트로 변하여 약간의 돈을 주면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는 다이버들이 다리 위에서 기다리곤 한다.


다리 양쪽에는 이슬람계 병사들이 화약고로 이용했던 탑이 있고, 터키인 거리 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모스크였던 곳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내전 전의 스타리 모스트 다리, 파괴된 사진, 복원된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튿날 모스타르를 떠나 수도인 사라예보로 향하며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규명되지도 않은 무서운 소문이 세르비아인에게 공포심을 조장했고 그것이 잔인한 학살로 이어졌지만

몇 십 년이나 친밀한 이웃으로 지낸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눈 것은 인간이 종교와 정책에 의해

얼마나 쉽게 표변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 사건이었다.




사라예보는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등 발칸 지역에서도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복잡한 역사를 지니게 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이슬람 신도들이 도시민의 반 이상이고 무슬림 지구를 한번 돌아보면 터키의 중소도시 같은 기분이 든다.

몇몇 관광식당을 제외하면 물가도 상당히 저렴하고, 아직도 건물에 총탄자국이 남아있는 곳을 보는게 어렵지 않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영원히 역사에 남을 도시로, 우리는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비극의 현장

라틴다리와 옛날의 카페였던 뮤즘을 돌아보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투르크를 축출하고 190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합병하자 믈라다보스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이 왕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을 암살했던 1914628일에 절정에 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의 전시동원을 위한 구실로 이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을 재촉했다.



역사적인 사건이야 그렇다지만 사라예보는 1973년 이에리사 선수가 탁구로 우승한 우리에게는 아주 친근한 도시이다.

또한 1984년에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는데 올림픽 스타디움은 현재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묘역 안에는 묘지마다 하얀색 십자가 또는 검은색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하얀색 십자가는 무슬림(이슬람교)을 상징하며

검은색 십자가는 정교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한 도시 안에 성당과 모스크가 번갈아 자리를 잡고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조용히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보스니아 내전은 19924월에 시작해서 199512월에 끝났으며, 20세기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430만 인구 중 27만명이 사망했으며 2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57개 도시가 파괴됐다.

여행은 이런 아픈 역사를 체험하며 같이 아파하고 위로하며 또다른 작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2018,1,2 월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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