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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포토기행(길에서 길을 생각하며)

아씨고원에서 길을 찾다.

by 아네모네(한향순) 2018. 5. 22.




아씨고원에서 길을 찾다.

                                                                                                                                                     한 향 순

 

고원의 길은 끝날 것 같지 않게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하얀 설산이 빙 둘러싸여서 웅장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길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덜컹거리는 지프로 협곡을 지나 산을 넘을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과 새로운 풍광에 압도되어 말을 잃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나무 한그루 없는 고립무원의 고원에는 갖가지 앉은뱅이 야생화만 피어있었다.

노란색과 보라색, 분홍색 꽃들이 서로 자리를 내어주며 아옹다옹 뒤섞여 있다.

드디어 제일 높은 고원에 도착한 우리는 지프에서 내려 끝없이 이어진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하얀 겨울과 녹색의 봄이 공존하는 계곡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도 바람을 따라서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걷고 싶었다.

아직도 낯선 길은 내 가슴을 뛰게 만들고, 잠재우지 못한 호기심은 새로운 길을 찾아 기웃거리게 한다.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90Km쯤 가면 일레알라타우국립공원이 나오고 국립공원에서도

한참을 올라가면 백양목 숲이 장관인 투르겐 계곡이 나온다.

그 계곡을 거쳐 험준한 협곡을 몇 구비 더 넘어야 해발 2800킬로미터쯤 되는

아씨고원의 광활하고 신비한 원시자연의 모습들과 만날 수 있다.




                               아씨고원에는 상징적인 시설물이 있는데, 거의 정상이라고 볼 수 있는 고지에 있는 천문대이다.           

                 나침판처럼 여행자들의 길잡이가 되어주고 넓은 벌판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 역할을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행자들은 천문대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아쉽게도 천문대에는 들어갈 수 없다.

아씨고원으로의 여행은, 대부분 오지여서 전화통화도 안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초자연적인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가는 길도 험해서 위험을 무릎 쓰고 도전하는 사람들만이 짜릿한 스릴을 맛 볼 수 있다.


아씨고원의 규모는 생각보다 아주 크다. 아씨 강(Assy River)을 따라 고원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아씨고원에서

협곡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카자흐스탄의 그랜드캐넌으로 불리는 차른계곡 방향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한다.

천문대를 출발하여 꼬벡마을 근처에 있는 바르토가이 호수까지는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고원에는 키 큰 나무는 전혀 보이지 않고, 골프장처럼 초록색 풀이 끝없이 넓은 벌판을 뒤덮고 있다.

초록색 카펫 위에 간혹 노랑, 분홍, 보라색 무늬가 새겨진 것처럼 보이는 곳은 갖가지 야생화가 군락지를 이룬 곳이다.

앉은뱅이 야생화를 제대로 보려면 몸을 한껏 낮춰서 들여다보아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풀꽃시인 나태주님의 시처럼 같이 간 일행들은 들판에

 배를 깔고 엎드려 야생화를 촬영하느라 모두 정신이 없다.




아씨고원은 지대가 높아서인지 기후 변화가 심해서 파랗던 하늘이 금방 검은 구름에 휩싸이고

세찬 바람이 웃옷도 벗겨질 만큼 거세다. 저 멀리 협곡 아래로는 개미떼만큼 조그만 말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이고

 하얀 동전만한 유목민들의 유루타도 보인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저 멀리 유루타가 있는 곳이다.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려면 유목민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함께 온 일행이 십 여 명은 되었지만, 각자 흩어져서 열심히 촬영을 하다보면

어느새 주위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기도 한다.

계곡사이로는 설산에서 녹아내린 차디찬 계류가 거센 굉음을 내며 떨어지기에

웬만큼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녹색 구릉 사이로 에스 라인을 만들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한없이 걸으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돌아보면 내 인생길도 먼 길을 걸어왔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기쁘고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쓰러지도록 힘들어서 삶이 노엽고 슬플 때도 있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걷다보니 어느새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들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혜가 깊어지고 작은 가슴도 넓어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집과 편협함이 쌓이고 나를 해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섭섭한 감정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내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나를 자각하는 서글픔이고 아픈 고통이다.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멀리 보이는 톈산산맥은 우리말로 천산산맥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부터 키르기스스탄까지 3천 킬로미터 정도 뻗어 내려온 긴 산맥이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중원지방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지중해 동쪽 해안에 이르는 동서를 잇는 교역로이다.

그 길은 거대한 천산산맥을 중심으로 천산북로와 천산남로로 나뉘어 있는데,

그 길의 중심에 놓여 있는 중앙아시아는 동서양 문명의 교량역할을 했다.





옛날 사람들은 척박하고 위험한 비단길을 온갖 고생을 하며 목숨을 걸고 다녔을 것이다.

그들은 왜 고행을 자처하며 낯선 길을 가야만 했을까. 가족을 부양하고 돈을 벌기 위해 길을 나섰을까.

 아니면 편안한 곳에 안주하고픈 그들의 가족이 등을 떠밀었을까.

나름대로 절박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낯선 길을 찾아 나서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사람들이 앞서 지나갔던 끝없이 펼쳐진 그 길을 바라보며 묵묵히 길을 걷는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그리고 그 길에서 내가 정말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인지 답을 찾고 있다.

  


   


                                                     

                                                                                            2018년 5,6월호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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