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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멘토같은 친구에게

by 아네모네(한향순) 2020. 3. 8.



         에세이 21, <2020년 봄호>


멘토 같은 친구에게

 

                                                                                                                                                     한 향 순

 

                              본희엄마~

벌써 한 해가 저무는 세모에 서있습니다. 대망의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다고 떠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며칠만 지나면 2020년이니 새삼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게 됩니다.

나이로도 몇 년이나 위이고 선배인 당신의 호칭을 바꾸려고 애썼지만, 처음 만나 부르던 것이 습관이 되어

친숙한 이름으로 부르니 융통성 없는 사람의 무례를 이해하여 주기바랍니다.


1970년대 중반쯤, <여성동아>에 실린 당신의 글을 읽으며 감동을 받고 기억된 이름도 “000”보다는 본희엄마였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던 유치원에서 본희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 우리가 만나게 된 인연도 그 이름 때문이었지요.

만나기전부터 잡지에 발표된 글을 통하여 당신의 생각이나 생활을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나봅니다.

우리 아이와 본희가 여섯 살짜리 동갑에 같은 유치원을 다니고,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 외에도

당신이 잡지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내게 퍽 호감을 주었지요.


그 후, 글 쓰는 것을 동경하던 나도 조금씩 흉내를 내며 여기저기 투고를 하곤 했답니다.

당신은 마치 슈퍼우먼처럼 직장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면서 밤새 책을 읽고 글을 쓰곤 하였지요.

신간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사서보고 나에게도 책을 빌려주곤 했구요. 살림에 찌들어

책에 목말라하던 나는 당신이 일터에 가고 없어도 그 집 서재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빼오곤 했지요.

그리고 잠시 틈이라도 생기면 우리는 끝없이 책 이야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아이가 사고로 눈을 다치게 되고 끝없는 절망과 슬픔에 잠겨있을 때,

당신은 곁에서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며칠 동안 둑 터진 봇물처럼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글을 쓰면서 나는 서서히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게 되었고,

여성동아에 논픽션이 당선 되면서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하였지요.

그리고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문단의 말석에서나마 책을 내고 글을 쓰면서 늙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오랜 세월동안 내 생일에는 잊지 않고 꼭 책을 선물하며 이런 글들을 써주었지요.

그냥 그렇고 그런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눈을 뜬다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 또한 오늘과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이렇게 침체되고 허우적거리는 마음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러나 세월로 다져진 우리의 우정은 오늘 같지만은 않으리라 믿습니다. 진정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생일을 축하 합니다.”


몇 년 전 당신이 큰 수술로 생사의 기로에 있을 때, 나는 당신의 강인한 의지를 믿고 밀려오는 불안을 떨쳐야 했지요.

사십 킬로도 안 되는 몸으로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힘들어 할 때는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도 컸지만,

정신적으로 강한 당신은 그렇게 힘든 시간을 조그만 몸으로 용케 버티면서 어두운 터널을 서서히 빠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때론 기쁘고 슬픈 추억을 공유한 시간들이 쌓여 사십 년이 흘렀고 그때 유치원생이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식을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 되어 중년이 되었네요.

한 달 전쯤, 호주에 살고 있는 아들네에 갔다가 여행을 하면서 화곡동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모하게도 고만고만한 두 집 아이들을 데리고 억척스럽게 여기 저기 놀러가고 멀리 여행을 다니기도 했지요.


그래서인지 요즘도 아들네 집에 가면 만사를 제쳐두고 제 어미가 좋아하는 여행을 하자고 한답니다.

이번에는 아이들과 호주에서 가까운 뉴질랜드를 여행했는데, 같은 공간에서 2주 정도 지내다보니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아이들 어릴 적 추억담을 되새김질 했네요.

그때는 어느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하면 서로 나누어 먹고 과일주를 담그면 남편들까지 모여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벌이던 혈기 넘치던 우리의 젊은 날들이 있었지요.


그런가하면 작년에 우리는 다른 친구들과 같이 치앙마이 여행을 하면서 당신에게 많이 놀랐던 적이 있지요.

평소에 거의 화를 내지 않고 친구의 허물까지 덮어주던 따뜻한 성품의 당신이 유난히 예민해져서

친구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 자신감이 없어지고 자꾸 실수를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나고,

남을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게 되니까요.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노년에는 아픈 곳도 많아지고 힘들고 외롭겠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젊은 날에 만나 굴곡진 시대를 살아오면서 거친 바람과 폭우가 있는 평탄치 않은 시간을 꿋꿋하게 살아왔으니까요.

우리가 늙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외로움을 나누며,

또한 멀리서나마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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