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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산불

by 아네모네(한향순) 2020. 3. 21.


 

2020년 봄호 <에세이 문학>



산 불

                                                              


                                                                                                                                     한 향 순


 

오늘도 TV 뉴스에서는 호주의 산불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호주의 산불은 지난해 11월에 발생해 두 달 넘게 꺼지지 않고 있으며, 호주 국토 중 5가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82배에 달하는 규모이며, 1400여 채의 가옥도 파괴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번 산불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동물은 호주의 대표 캐릭터인 코알라이다.

코알라는 동작이 느리고 이동을 잘 하지 않는 습성 때문에 뉴사우스웨일스 해안에서는 팔천 마리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게다가 지금 호주에는 고온과 강풍이 더해지면서 화염 토네이도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화염 토네이도는 큰불이 강풍을 타고 16km까지 솟구쳐 오르며 이동하는 현상인데, 이로 인해 호주 당국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주민들의 빠른 대피를 당부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의 나라 산불 이야기 같지만 남의 일 같지만 않은 것은 불과 한 달 전, 내가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해 12, 아들이 살고 있는 호주 브리즈번에 다녀오기로 하고 세운 계획은 아이들과 함께

뉴질랜드와 시드니를 여행하는 것 이었다. 우리는 계획대로 브리즈번에서 아이들과 뉴질랜드로 가서 8일간의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시드니에 도착하니, 시드니 공기가 매캐하고 조금은 이상하였다.

호주에 산불이 나서 진압이 안 되고 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대도시인 시드니에까지 영향이 미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12월 초순인 그때까지만 해도 오페라 하우스나 하버브리지가 있는 시내중심가에는 별로 산불 영향이 별로 없어

계획했던 여행일정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우리는 블루 마운틴을 가기위해 일찌감치 길을 떠났는데, 두 시간 정도 달리고 나니

앞이 안보일 정도로 사방은 연기로 가득차고 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남의 나라 도로 사정이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내비게이션이 가르치는 대로 30분쯤 더 달리고 나니

도로에 차들이 확 줄어들며 비상사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차를 겨우 어느 상점에 세우고 아들이 들어가 상황을 알아보았더니 불길이 이 도시 인근에까지 번져서

연기로 길이 막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손자들은 겁이 나서 술렁거리고 우리는 어찌할 줄을 몰라 난감했다.

빨리 차를 돌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안전한 길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갈팡질팡하다가 겨우 연기를 피해 탈출에 성공하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지며 긴장이 풀렸다.

고작 몇 시간 동안이지만, 그 상황 속에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손자들과 아들네 식구는 물론, 딸과 우리부부까지 가족전원의 여행이라 우리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구에게 제일 먼저 알리고 뒤처리를 부탁해야 할까.


어린 손자들이 다치게 되면 여행을 제안한 내 처지는 어떻게 될까.

부질없는 잡념들만 머리를 맴돌고 현명한 대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아무 탈 없이 그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갔지만,

매캐한 연기로 우리를 조여오던 그날의 기억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시드니 여행을 마치고 아들이 살고 있는 브리즈번에 왔는데도 몇 달 동안 이어진 가뭄과 더위는 식을 줄을 몰랐다.

호주의 여름은 매우 덥고 습한데, 주로 호주 중심부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습하고 더운 공기가 대기 중에 발생된 안개나 연기와 닿게 되면 정전기를 만들어 내는데,

이로 인해서 스파크가 튀면서 작은 불씨가 생성된다고 한다.

더구나 호주에서는 유칼립투스라는 식물이 많이 자생하는데,

이 식물은 알코올성 공기를 배출하여서 불을 더 빨리 타게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들네가 살고 있는 브리즈번은 산불 지역과는 멀리 떨어져있어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며칠 후, 풍광이 좋은 국립공원으로 소풍을 가자며 며느리가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다섯 시간을 운전해서 도착한 국립공원은 사람구경은 할 수도 없고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얼마 전에 산불이 나서 그 풍광이 좋던 곳은 불에 그을린 나무들과 잿더미만 수북이 쌓여있었다.


몇 년 전에 갔다가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서 우리를 안내한 며느리는 울상이 되었고 우리는 그저 난감하기만 하였다.

간신히 손자들을 달래서 산 중턱까지 올라가면서 우리는 자연의 중요성과 산불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행길에서 꼭 아름답고 좋은 것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피폐한 장면들도 오랫동안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더불어 자연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고 있는지 잃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는 바보들의 여행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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