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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 ( 인연의 끈)

다른 사람에게 갚아라

by 아네모네(한향순) 2020. 3. 8.



                                                                                       계간수필 <2020년 봄호>





다른 사람에게 갚아라.

    


                                                                                                                                                                                    한 향 순

 

아침에 신문을 읽다가 김형석 선생의 ‘100세 일기가 눈에 띄었다.

올해로 100세를 넘긴 노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선생은 아직도 왕성하게 강의를 하시고 글을 쓰고 계시다.

그 끊이지 않는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경이롭고 궁금할 때가 많다.

오늘의 이야기는 제자였던 B라는 여의사의 이야기였는데, 그녀가 죽고 나자 그동안 숨겨진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녀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선생이 여러 해 전에 지방 강연을 갔는데, 어떤 젊은 청년이 찾아와서 어려울 때 학비를 대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란다.

 자신은 청년에게 그런 일을 한 일이 없는데 이상하여 뭔가 잘못 알았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청년은 학비가 없어 고생하고 있을 때 여의사인 B가 장학금을 주면서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려울 때 김형석 선생이 도와준 것이다.

너도 다음에 사정이 허락하면 이 돈을 다른 사람에게 갚아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말은 들은 선생은 80여 년 전, 자신을 도와준 모우리 선교사가 생각났다.

가난한 중학생이던 그에게 선교사는 이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니 너도 커서 살아가다가 가난한 제자가 생기면

예수님 대신 제자에게 갚아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사랑이 여러 사람을 거쳐서 젊은 청년에게 전달되었다는 감동적인 일화였다.


그 글을 읽고 잠깐 가슴이 먹먹해지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받은 많은 사랑을 남에게 갚으며 살고 있는가.

돈은 받지 않았더라도 살면서 받은 사랑의 이어달리기를 잘 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반문해 보게 되었다.


지난 달, 아들이 살고 있는 호주의 브리즈번에 갔다가 가족들과 근처에 있는 스트라드부르크라는 섬에 놀러가게 되었다.

아들네 네 식구와 우리 부부는 한차로 가기 위해 지인에게 큰 차를 빌려 부푼 마음으로 소풍을 떠났다.

그곳은 4년 전에도 한번 다녀온 적 있는 곳인데, 너무 아름답고 신비스런 곳을 성급하게 다녀온 아쉬움에

이번에는 차분히 돌아보려고 다시 가게 되었다.


페리를 타고 얼마쯤 가다가 섬에 도착하자, 우리는 인상 깊었던 갈색호수인 브라운 레이크를 가기 위해 네비게이션을 켰다.

그러나 목적지를 유도하는 기계는 자꾸 이상한 길로 가라고 안내를 하고 있었다.

사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도 이런 곳은 아닌데 의아해 하면서도 길을 모르니 기계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운전을 하는 아들도 생소한 길이라며 다른 코스가 있는 것 같다고 자꾸 좁은 길로 들어섰다.

아니나 다를까 험한 길을 조마조마하며 가다가 차가 모래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스트라드부르크 아일랜드는 원래 모래섬이라 정해진 도로로만 달려야하는데 아들이 네비게이션만 믿다가 낭패를 당한 것이다.

날씨는 40도가 웃도는 땡볕에 비지땀을 흘리며 모두 차에서 내려 자동차를 밀면서 모래에서 빠져나오려고

 한참동안 애를 썼지만 차는 점점 더 깊숙이 모래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구원을 요청한다 해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섬에 누가 배를 타고 빨리 달려 올 것이며,

차를 빌린 지인한테는 보험서비스 요청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대로 무작정 기다려야 된다니

 아이들은 겁을 먹어 울상이 되었고 우리도 더위에 지쳐서 진땀이 나고 맥이 풀렸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차 한 대가 우리 있는 방향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차에서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들이 여럿이 내리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상황을 살펴보더니

힘들겠다는 뜻인지 머리를 갸우뚱하였다.

그러더니 자기들 차에서 무슨 깔판 같은 것을 가져와 차바퀴에 대고 대 여섯 명이 달려들어 차를 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는 모래바람만 일으키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리 저리 방법을 모색하느라 우리보다 더 애를 쓰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어디서 빌려왔는지 굵은 밧줄을 그 차에 연결하여 간신히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우리는 물론 아이들도 너무 고마워서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몰랐다.

아들이 그들에게 묻자 그들은 아니라고 사양을 하며 가던 길로 떠나버렸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건넨 말은 고마우면 다른 사람에게 갚아라.”라는 말이었다.


이십여 년 전 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일이 있었다. 손님을 초대해놓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차 통행을 못하게 돌을 세워놓은 곳에 차를 얹혀놓게 된 것이다.

마음은 급하고 차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발을 동동거리는데 어느 남자가 묵묵히 다가오더니

땀을 흠뻑 흘리며 차를 고치는 것이었다.

차 밑에 들어간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도 대답은커녕 들은 척도 안하니

나중에 엉뚱한 수리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하였다.

한 시간이나 걸렸을까 수리를 마친 그에게 고맙다고 얼마의 돈을 건네니

그는 펄쩍 뛰고 사양을 하며 자기는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유유히 사라져 갔다.

그런데 그것은 말이 아니라 그의 손짓 몸짓으로 하는 수화였다.


그 감동은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서 그때의 고마움을 남에게 갚으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 후, 그 결심을 얼마나 지키며 살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내 삶의 지표가 되었다.

섬 여행을 하던 날도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들도 남에게 갚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1994<에세이 문학>등단

수필집 : 불씨, 한줄기 빛을 찾아서

포토기행 : 길에서 길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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