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팀을 따라 강화 전등사 근처에 있는 정족산성을 찾았다.
정족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가파른 외측면 산세를 이용한 천혜의 군사기지로 알려져 있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위에서 둘러싼 능선에 산성을 쌓아
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된 것을 말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현수 장군이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격퇴할 정도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강화도 정족산성(삼랑성)이 고조선 초기인 4천년 전 축조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 곧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전해지며 삼랑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다.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고, 4곳의 치(雉)도 확인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으로 되어 있다.
성곽을 따라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숨이 턱에 차고
가랑비에 젖은 땅은 미끄러웠지만 행여 낙오될까봐
부지런히 일행들을 따라 산을 올랐다.
정족산성은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때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때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1860년대의 강화도는 개화와 쇄국의 갈림길에 놓여 있던 조선의 급소였다.
이 무렵 조선의 앞바다에도 이양선(異樣船)들이 수시로 출몰했다.
‘모양이 다른 배’라는 뜻을 가진 이양선은 서양에서 온 상선들이었다.
이름은 상선(商船)이지만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조선의 섬과 해안을 드나들며
수심을 재고 지형을 살폈다.
조선 고종 때인 1866년 초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지하며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처형했다.이를 병인박해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중국으로 도망쳐
이 소식을 프랑스군에게 알렸다.이에 프랑스군 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7척의 함선과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와 강화도를 침략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한 뒤, 프랑스인 선교사를 죽인 책임자를 엄벌하고
통상 조약을 체결하라며 조선 정부를 위협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부대를 편성하여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화력이 좋은 신식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에 조선군보다 전력이 훨씬 강했다.
조선군을 이끌게 된 양헌수는 몰래 강화도로 건너가 삼랑성(정족 산성)에 진을 치고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정족 산성 전투에서 패한 프랑스군은 더 이상 강화도를 점거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책 340권과 은 19상자 등을 훔쳐갔다. 그리고 나머지 서적들은 불에 타 버렸다.
프랑스군이 가지고 간 외규장각 도서는 주로 왕실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였다.
이후 우리나라는 병인양요 때 가져간 도서들을 반환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 형식으로 반환하기로 합의했고,
2011년 4차례에 걸쳐 296권의 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문화재,가톨릭 성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례 화엄사 (0) | 2021.11.15 |
---|---|
강화 연미정 (0) | 2021.11.03 |
원주 구룡사 (0) | 2021.10.24 |
단원이 그린 청심대 (0) | 2021.09.29 |
오죽헌 (0) | 2021.08.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