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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두달 간의 추억

by 아네모네(한향순) 2012. 12. 21.

 

 

 

    

두 달간의 추억

 

 

무심코 방문을 열다가 빈방의 썰렁한 기운에 놀란다. 아직 치우지 못한 아이들의 장난감과 옷가지들이 눈에 띄고 잠버릇이 고약해서 이리저리 구르며 자던 녀석들의 귀여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호주에서 태어나 자란 손자들이 방학 중에 한국에 왔다.

 

 저희 부모는 바빠서 같이 오지 못하고 저희끼리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한해 사이에 훌쩍 커버린 손자들이 목에 커다란 카드를 걸고 공항직원의 안내를 받아 입국심사대에서 나오는 것을 보니 울컥하도록 반가웠다.

 

아홉 살, 여섯 살 어린것들이 부모를 떨어져서 멀리 한국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기특하고 대견하기만 했다.

그러나 두 녀석들이 오고부터 조용하던 집안은 폭탄을 맞은 전쟁터 같이 변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거나 뛰지 말라는 잔소리는 설득력 없이 반복되는 연극대사처럼 공허해지고, 항상 아래층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더구나 우리 식구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강아지 두 마리는 수난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두 녀석이 귀엽다고 주무르는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보니 강아지들은 아이들을 보면 공포에 떨며 구석진 곳으로 숨고,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전투를 매일 겪어야 했다.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있던 손자들에게 그동안 못주었던 사랑을 마음껏 주고 내가 옛날에 경험했던 푸근하고 인자한 할머니가 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제 부모 대신 훈육도 시켜야하고 예절도 가르쳐야 되니 손자들에게 큰소리 안내고 조근 조근 대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더구나 요즘 젊은 부모들이 아이의 기를 살려준다고 자유롭게 키우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우리 부부는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한국의 말과 글은 물론, 문화와 예절을 제대로 가르치려고 애썼다.

 

게다가 그곳에서는 배울 기회가 적은 수영 레슨과 피아노 교습까지 시키려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주말이면 민속촌이나 박물관을 찾아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했고, 제주도나 강원도를 여행하며 눈이 없는 곳에서 온 아이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다.

 

손자들과 놀이 공원이나 롯데월드에 가서 놀이기구도 타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나 햄버거도 자주 먹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마치 중요한 임무를 맡은 수행원들처럼 계획을 세워가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것은 모처럼 얻은 손자들과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삼십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 아이들을 키우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무엇이 그리 조급했는지 항상 아이들보다 부모의 의욕이 앞서서 아이들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매달 보는 시험성적에 연연하여 신경을 쓰다보면 아이들을 혼내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아이들이 조금 커서는 그 애들의 실력이 늘 성에 차지 않았고, 현실을 제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에 마음은 늘 초조하고 무언엔가 쫓기듯이 다급했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이제는 그런 의무감과 초조감에 시달릴 일도 없으련만 나이를 먹어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보다. 그저 사랑만 주기에도 부족한 두 달 동안, 우리는 손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가르치려고 전전긍긍하였다. 또한 그것이 조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체력이 약해서 운동을 싫어하는 작은 녀석이 수영을 안 하려고 온갖 꾀를 부렸다. 수영장에 갈 시간만 되면 배가 아프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곤 했다. 그래도 나는 그런 말을 무시하고 매정하게 아이의 등을 떠밀어 물속에 집어넣곤 했다. 어느 날은 자다가 잠꼬대를 할 정도로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았지만,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된다며 아이를 윽박지르곤 했다. 속으로 사내 녀석들은 체력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나름대로 합리화를 시키면서...

 

그래도 큰 녀석이 할머니! 저는 호주보다 한국이 너무 좋은데 여기서 공부하고 학교 다니면 안 되나요?”라고 묻는 걸 보면 제 생명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것을 아는가 싶었다. “지금은 안 되고 종욱이가 좀 더 큰 다음, 엄마 아빠가 허락하면 그때 다시 오너라.”라며 허전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이들이 떠나고 썰렁해진 빈자리를 보며 두 달 동안 힘겹게 보낸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먹는 것부터 입는 것도 까다롭던 녀석들이기에 보살피기 쉽지 않았던 두 달이었지만,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지내다 제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감사하다.

 

간혹 감기나 충치치료 때문에 병원출입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많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있다가 제 부모에게 보내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먼 훗날 아이들이 한국에 있던 두 달 동안을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에게도 영영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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