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가을 연가

by 아네모네(한향순) 2012. 12. 21.

 

 

가을 연가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동안 늦더위 탓인지 시월이 되고도 덥다. 덥다.”했는데 갑자기 며칠 전부터 기온이 떨어지더니 오늘은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무언가 허전한 마음을 돋구어주었다. 어느새 가을이 그림자처럼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가끔은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러 나가는데, 집에서 10여분 쯤 가면 체육공원이 나오고 그 안의 트랙을 한 시간 가량 빠르게 걷다가 온다.

 

오늘도 추워진 날씨 때문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운동복을 걸치고 나왔다. 그리고 트랙을 서너 바퀴쯤 돌았는데, 어디선가 찬 공기를 가르며 색소폰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색소폰 소리는 끊어질듯 하다가 이어지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대체 이 밤중에 어디서 누가 연주를 하는 것일까라며 처음에는 무심히 듣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그곳은 공원 아래쪽에 있는 작은 야외 음악당이었는데 조명도 없는 컴컴한 무대 위에서 장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어 자세히 보니 관람석에는 나처럼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열 명 정도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음악을 듣고 있자니, 초보자가 아니라 프로를 능가하는 훌륭한 연주 솜씨였다. 그는 커다란 스피커에 반주기까지 갖추어서 멋진 곡들을 연주하고 있었다.

 

한참 음악 속에 빠져 있는데. 우리에게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신청곡을 받겠다고 하였다. 몇 사람이 신청곡을 말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러브 스토리>의 주제곡이며 <눈이 내리네.>등 아름다운 곡들이 그의 색소폰을 통하여 별빛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도 소리에 끌려 정신을 팔고 있다가 얼결에 <어텀 리브스>를 신청했다.

 

드디어 그의 혼을 뺏는 듯한 음악이 연주되자 나는 나이를 잊고 가을 연가 속으로 무작정 빠져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아마도 사십년은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인천의 자유공원의 광장에는 지금처럼 가을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마치 죽을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정신까지 혼미해져서 무작정 뛰어나온 것이 그 곳이었다. 가난과 사랑 때문에 아파하며 치열하게 살던 젊은 시절이었다.

 

그날은 뭉개진 자존심 때문에 구차스러운 삶과 힘든 사랑마저 포기하고 싶었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던 색소폰 소리는 마치 나를 위해 누군가 숨어서 연주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 들었던 멜랑코리한 <어텀 리브스>의 묘한 마력.

 

찬바람은 버버리 코트자락을 헤집고 들어와 시린 가슴을 더욱 춥게 만들었고, 삶의 의미마저 떨어진 낙엽처럼 희미해졌었다.

그러나 바람을 가르고 들려오는 색소폰소리는 삶에 지친 나를 위로해 주는 듯 가슴을 파고들었다.

 

한참을 음악 속에 빠져서 울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스멀스멀 어떤 오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섣부른 감상에 빠져 감정을 과대포장하고 있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한창 청춘이었던 그때쯤이면 누구나 겪을만한 아픔이고 고통이었건만 그때는 나 혼자만 큰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가끔 찾은 공원이지만 다시는 그날의 색소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소리의 추억 때문에 기억나는 다른 장면 하나, 십 오륙 년 전이던가 낙엽도 모두 떨어진 추운 겨울이었다. 친구들과 운동을 하러 갔다가 헤어진 분당의 공원입구에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굳이 식사를 하고 가자는 일행의 권유에 못 이겨 저녁을 먹고 나오니 까만 어둠 속에서 함박눈이 소리 없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그 하얀 눈발 속에 어느 레코드점에서 들려오는 황홀한 <케니지>의 색소폰 소리.

 

갑자기 축복처럼 내린 눈과 천상의 소리 같은 색소폰 연주에 취해 우리는 추운 줄도 모르고 공원 광장을 뛰어 다녔다. 그때는 망토로 어깨에 두르는 외투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두 팔을 벌리고 뛰어다니면 하늘에서 검은 독수리가 땅위로 내려와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사십이 넘은 여인들이 동심으로 돌아가 한밤중에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축복처럼 느껴지고 황홀하기만 했다.

 

아무튼 그때 가슴을 울렸던 색소폰의 애틋한 매력 때문에 오늘 추위에 떨면서도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나 보다. 이제 어둠도 제법 깊어졌고 구경하던 관람객도 한명 두 명 자리를 뜬다. 나도 부스스 추억 속에서 빠져나오며 연주자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이제는 다시 건널 수 없는 세월의 강을 실감하며 모처럼 추억 속의 가을연가를 듣게 해준 색소폰 연주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어쩌면 바짝 메말라 건조해진 이 가을, 내 감성에 소나기 한줄기를 퍼붓듯 색소폰의 음률이 오랫동안 가을을 풍성하게 해줄 것 같은 예감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