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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모음/수필집(한줄기 빛을 찾아서)

남에게 웃음을 주는 일

by 아네모네(한향순) 2012. 12. 21.

 

 

남에게 웃음을 주는 일

 

 

 

며칠째 벼르던 퍼머넌트를 하기 위해 미장원에 들렸다. 여전히 그곳은 나이든 손님들로 붐비고 칠십을 바라보는 원장님은 오늘도 건강한 웃음을 지으며 반겨주었다. 유난히 머리카락이 가늘고 숱이 없어 파마가 잘 나오지 않는 나는,

 

석 달에 한 번쯤 단골 미장원으로 나들이를 한다. 여기에 오는 고객들도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 요즘 유행하고는 거리가 먼 중년이나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미장원하고는 다르게 분위기 또한 가라앉고 실내는 조용한 정적이 감돌기 일쑤이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손질하는 시간이 지루해서 롤을 끼운 채 깜박 깜박 졸기도 하고, 침침한 눈으로 하릴없이 잡지를 뒤적이거나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오늘도 무겁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치켜뜨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는데 어느 중년 여인이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약간은 억센 듯한 경상도 억양이었는데, 이야기 내용도 그렇지만 그 어투가 어찌나 우습던지 처음에는 그저 쑥스러운 미소만 짓다가 나중에는 모두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나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손님들이나 미용사들도 모두 허리를 쥐고 웃다가 기어이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반응에 신이 났던지 그 여인은 자기가 알고 있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쏟아 놓았다.

 

서로 눈치만 보며 조용하던 미장원 안은 갑자기 활기가 돌며 여기저기에서 유머에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정말 말 된다. 아유! 누가 지어 냈는지 기막히게 맞는 말이네.”라며 원장님도 한몫 거들었다. 흔히 시리즈로 된 우문현답(愚問賢答)에는 과장이나 허풍이 많지만 그 안에 시대적인 배경이나 사회상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에 모두 같이 공감하고 웃을 수 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유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직업적인 사람들만이 남을 웃기고 재미있게 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요즘은 아주 유능한 CEO 마저도 유머 감각이 없으면 자질을 의심 받는다고 한다.

 

그만큼 유머가 우리 생활에 활력소가 되고 지루한 일상에 맛깔스런 양념이 되기 때문이다.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일소일소’(一笑一少)라던가, 몇 초 동안의 웃음이 백 미터를 달리는 효과와 같다는 말이 아니더라도 웃음이 보약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남을 즐겁게 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타고난 재주가 있거나 그 방면에 자질이 없으면 똑같은 말을 옮겨도 아이들 말처럼 썰렁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같이 멋없고 재주가 없는 사람은 아예 그런 방면에는 포기를 하고 살아왔다. 그저 남이 재미있게 하는 말을 듣고 덩달아 웃기나 할 뿐이었다.

 

얼마 전에 우리 문학회에서 주최하는 기념행사에 초빙하기 위해 K회장님을 모시고 온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이시며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K선생님과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역시 고귀한 인품에서 풍기는 여러 가지 말씀이 훈훈한 감동을 주었다.

 

이야기 끝에 선생님의 수필 중에 해학적인 작품을 여럿 읽었는데, 원래 성품이 재미있으신가 보다고 여쭈었더니 선생님은 껄껄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원래 타고난 성격은 그렇지 않았는데 오래 전부터 유머의 중요성을 깨닫고 많이 연구하고 노력을 하셨다고 한다. 딱딱한 교훈이나 무거운 설교보다는 멋스런 유머 속에 자기의 사상이나 가치관을 은근히 담아 전달하는 것이 청중에게나 독자에게 훨씬 설득력이 있고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다. 대쪽 같은 학자 생활을 하시면서도 일찌감치 유머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력을 하셨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웃음의 요소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모든 사물을 오해 없이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사람은 사소한 일에서도 재미를 느끼고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남을 웃게 하려는 마음 또한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깊은 배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웃게 하려면 자신이 근엄해져서 목에 힘을 주기보다는, 스스로 망가지거나 한없이 낮아지려는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남에게 웃음을 주며 자신까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은 얼마나 기쁘고 값진 일일까.

 

요즘은 나같이 재미없는 사람도 어떻게 하면 남에게 웃음을 줄 수 있을까 하고 고심을 하게 된다. 며칠 후에는 친구들과 이틀 동안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모처럼의 즐거운 여행길에 친구들을 봄 햇살처럼 웃게 하려면 오늘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들려주어야겠다. 그러나 방금 들은 말도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리는 요즘, 메모라도 해서 열심히 외워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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