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 여행기/터키 여행

터키의 이스탄불 (2006, 11 )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5. 9.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어두운 밤중이었는데, 그것은 터키가 서울보다 7시간이 늦기 때문이다.

공항도 컴컴하고 모든 도시가 어두워서인지 별다른 감흥도 느끼지 못 하고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눈을 부쳤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어쩐 일인지 버스가 늦어지는 것 같았다. 빠듯한 오늘 일정 때문에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짐은 인솔자에게 맡기고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오늘의 행선지인 톱카프 궁전(Topkapi Sarayi)으로 걸어갔다.

 

 

호텔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궁전이 있었는데,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왕)들이 세계의 곳곳에서 모아들인 진기한 보물과 유물들을 모아서 보관하고 진열해 놓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개의 문을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첫 번째 “황제의 문”을 지나서 조금 걸어가니 “경이의 문”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행복의 문”을 통과했다.

행복의 문은 황제에게 가까워져서 행복하다는 뜻으로 부쳐진 이름인가 보다.

 

 

 

첫 번째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니 은으로 만든 그릇들과 도자기로 만든 집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두 번째 방에는 술탄의 각종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에메랄드나 루비 사파이어 등과 금으로 장식된 각종 보물들이 호화롭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커다란 에메랄드가 세 개나 박힌 단검과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다이아몬드도 진열되어 있었는데, 우리 같은 서민들은 엄청난 보석의 양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또한 유명한 선지자들의 유물들을 모아놓은 곳도 있었는데, “다윗의 칼”이나 “사도 요한의 두개골” “모세의 지팡이” 등은 정말 진짜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드”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방에 들어서니 하얀 두건을 쓴 회교도 한 사람이 큰 소리로 코란을 낭송하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본 모하메드의 발자국이 박힌 돌은 신기하기만 했다.

 

 

원래 이스탄불은 기원전 7세기경 그리스의 “비자스”장군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이 도시의 이름은 장군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영화를 누리던 비잔틴제국은 동로마제국에 함락되었고 이곳을 동로마의 수도로 정하면서 “콘스탄타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천년동안 황금시절을 구가하던 동로마제국도 결국 강자 오스만 트루크제국에 패망하고 정복자인 술탄은 이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톱카프 궁전을 빠져나온 우리는 버스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를 운항하는 유람선을 타기 위해 부지런히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제야 이스탄불의 아침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이곳도 세계적인 대도시인 만큼 교통 체증이 만만치 않았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날씨가 좋아서인지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우리를 반겼는데, 해협의 한쪽은 유럽이고 다른 쪽은 아시아를 가르는 경계점이기도 했다.

 

이스탄불 사람들은 주로 아시아 쪽에서 거주하며 공공기관이나 상점이 많은 유럽 쪽으로 출퇴근을 한다고 한다. 원래 “보스포러스”라는 뜻은 “소가 걷는다.”라는 말인데 그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한국공원은 앙카라 도심 한복판에 있었는데 다보탑을 본뜬 위령탑과 한국식 청사초롱 등 한국의 정서를 표현하느라 애쓴 흔적이 보였다. 한국공원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죽은 터키 병사들의 영혼들을 기리기 위한 곳이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터키에서 제일먼저 지원군을 보내와 도와주었으며 그 전쟁에 참여했다가 죽은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다.

 

그렇게 볼 때 터키는 정말 고맙고 친근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잠시 묵념을 바치고 황망히 돌아섰다.

 

앙카라는 아타 트루크 대통령이 취임하여 옮긴 터키의 수도이다.

터키의 어딜 가나 그의 잘 생긴 초상화가 그려진 현수막과,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터키의 국기가 곧잘 눈에 띄곤 했다.

 

우리가 앙카라에 있던 날은 마침 그가 서거한 날이어서 시민들이 애도를 표하기 위해 그의 사당 앞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어물어물하다가는 행사 때문에 꼼짝없이 교통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한국공원에 들렸다가 아타 트루크 사당은 멀리서만 보기로 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소금호수는 수심이 2미터밖에 되지 않아 가물 때는 그냥 걸어서도 갈수가 있다고 한다.

호수의 짠물이 소금의 원료가 되어서인지 주위에는 소금 공장들이 많이 운집해 있고, 가게에서는 비닐봉지에 소금도 팔고 있었다.

 

어떻게 바닷물도 아닌 호수에 소금기가 배어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호수에 있는 물을 찍어서 맛을 보니 정말 짠맛이 났다.

옛날에는 소금이 귀했으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 큰 자원 역할을 했을 것이며, 소금호수는 노다지처럼 귀중한 자원 되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소금호수 근처에 조그만 토산품 가게들이 보여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물건값을 물어보니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이곳도 중국처럼 관광객에게 바가지요금이 성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앙카라에서 카파도키아 가는 길에 들른 지하도시 데린쿠유는 정말 어떻게 이런 도시를 만들었을까싶게 주도면밀하였다.

 

지하 21층 규모에 인구 일만 명이 거주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놀랄 정도였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뜻인데, 처음에는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이다가 BC 6세기경 페르시아군의 침입을 받을 때 주민들이 숨기 위해서 지하 도시로 발달하였다고 한다.

 

지하를 구경하다가 햇빛이 강한 밖으로 나오니 입구에서 머리를 가린 부녀자들이 민속 인형을 만들어서 팔고 있었다. 재료도 그렇고 솜씨도 조잡했지만 목화에서 실을 뽑아 감고 있는 인형의 표정들이 특이해서 헝겊 인형 두개를 샀다.

 

 

그러다가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숨어들었는데 나중에는 그 수가 일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하도시는 개미집처럼 상하좌우로 연결되어 있고 환기구와 배수로까지 있어 오랫동안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려주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바퀴모양의 돌문을 여러 군데 설치해 놓았고, 또한 여러 갈래의 길을 뚫어 침입자가 길을 잃도록 했다고 한다.

 

더구나 소나 말 같은 짐승들은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인지 제일 위층인 지하 일층에 두었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대소변은 용기에 받아 두었다가 밖에 내다 버리도록 했으며 학교나 교회 등 여러 사람이 필요한 집회장소도 있었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