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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기/동유럽

폴란드의 크라카우와 아우슈비츠

by 아네모네(한향순) 2009. 4. 30.

 

 

폴란드의 크라카우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이지적인 눈매를 가진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의 가이드를 따라 구 시가지를 구경하였다.

크라카우는 폴란드의 옛 수도이자 세계 제2차 대전 때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도시다. 그래서인지 옛것과 새것이 묘하게 잘 어우러져 있는 느낌이었다. 크라카우의 중심지에는 흰색으로 지어진 오래된 상점들이 있는데 옛날에는 피륙교역의 중심지였던 중앙시장이었다.

지금은 장식품과 인형, 호박 등 토산품을 팔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가격이 만만치 않아 민속 인형 두어 개만 사들고 돌아서 나왔다.

직물 시장 옆에는 구 시청 사옥이 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앙 광장에는 성 마리아 교회가 우뚝 서있는데, 고딕 양식으로 아름다운 내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폴란드에 와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여자들이 참으로 날씬하고 예쁘다는 것이었다. 맨 처음 유럽 사람들을 볼 때는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동양인중에도 중국이나 일본 사람과 한국인의 얼굴이 틀리 듯 그네들도 골격이나 얼굴모습이 나름대로 많이 달랐다. 특히 게르만족 여자들은 뚱뚱하고 살이 찐 사람들이 많았으나 슬라브 쪽 여자들은 얼굴이 작고 날씬하며 다리가 긴 전형적인 미인 형이었다.

 

 

 

크라카우에서 20여분을 가면 비엘리츠카의 소금광산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바다에서 염분을 채취하지만 폴란드는 땅속에서 굳어버린 소금 덩어리를 캐내는 암염으로 소금을 만든다.

그곳은 땅속이기는 하지만 좁은 탄광이 아니라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규모도 크고 아름답다. 그들은 700년 동안 소금을 캐내면서 놀라운 구조물과 조각품을 만들며 삶의 고단함을 풀었나 보다.

소금으로 만들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 조각품과 구조물들은 전문가가 만든 것이 아니라 소금을 캐던 광부들이 직접 만든 것이기에 더욱 놀랍다. 입구 가까이에는 제일 오래된 성 안토니오 교회가 있었는데 그들은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이 교회에서 미사를 드리고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소금광산의 최고 볼거리는 지하 100미터가 넘는 곳에 지어놓은 킹가 대성당이다. 길이54미터가 넘는 규모도 놀랍지만 “레오날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벽화를 보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고, 성경에 나오는 대목들을 벽화로 옮겨 놓은 것도 경탄을 금치 못한다.

다른 소금 광산에 비해 단단한 암염 층으로 되어 있어 아직도 조각품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일반인들을 위한 박물관이나 견학 코스로 활용되지만 더러는 기관지 천식이나 알레르기 환자들이 요양을 하기 위해 들렀다고 한다.

그것은 소금 때문에 세균이 잘 번식하지 못하며 공기 중에 미네랄을 포함한 여러 영양소가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날따라 햇볕은 작열하듯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빨간 벽돌 건물이 줄지어있는 정문 앞에는 철재로 된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일을 하면 자유로워진다.”라는 문구가 폴란드어로 적혀있었다. 그것은 독일 나치들이 유태인들을 죽이는 날까지 노동현장으로 끌고 가서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내걸은 표어라고 한다.

 

안내자를 따라 정문을 통과하니 수용소로 쓰였던 28동의 건물이 세 줄로 나란히 서 있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증거 관으로, 수용자들이 입고 있던 푸른 줄무늬의 죄수복과 그들이 사용하던 식기나 스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안경, 칫솔, 가방 같은 수많은 소지품들이 당시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어느 방에는 유태인들을 학살하기위해 나치들이 개발하였다는 티크론 가스통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조그만 깡통 하나가 400명을 죽일 수 있는 살인 무기였다니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유럽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퍼져있던 유태인들은 유토피아와 같은 집단 이주시설을 만들었다는 나치의 꼬임에 속아 모두 폴란드로 몰려든다. 원래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어로 축복받은 땅이라고 하는데, 유태인들의 끔찍한 지옥에서 지금의 전 인류의 성지(聖地)로 바뀌었다.

 

 

더구나 나치들은 유태인들에게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가볍게 들고 오도록 하여 사람들은 그 당시 유행하던 가죽트렁크 하나만 달랑 들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유태인들이 꿈에 부풀러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그나마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은 수용소에 남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소지품을 빼앗긴 채 샤워 실이라고 속인 가스실로 직행되어 곧바로 독살되고 말았다. 증거 관에는 그들이 샤워만 끝나면 곧 다시 찾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크게 써넣은 가죽가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발길을 옮기면 옮길수록 더 처참한 광경들을 볼 수 있었는데, 형벌 시설이 있는 11동이었다. 반복해서 2만 명을 죽일 수 있다는 죽음의 벽, 사방 1미터밖에 안되는 곳에 4명씩 집어넣어 며칠씩 서있는 고문을 하게 하는 “서 있는 방”, 샤워를 시킨다고 한꺼번에 400명씩 집어넣어 살포하던 가스실 등이 참혹한 역사를 말해주었다.

 지금은 비록 조용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그때의 아비규환이 들리는 듯하고 벽에는 안간힘을 쓰며 죽기 전까지 남긴 낙서로 필사의 항거를 하고 있었다.

 

 

 

네 번째 블록에는 나치들이 유태인의 머리에서 잘라낸 머리카락이 7톤이나 쌓여 있었다. 그것은 1945년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키고 찾아낸 것이라고 하는데 그중에는 어린 소녀들의 땋은 갈래머리도 있어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어린 아이들의 머리카락까지 잘라내어 카펫을 만들었다니 아무리 전쟁으로 인한 집단적 광기(光氣)라곤 하지만 “인간의 잔혹성이 과연 어디까지 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더구나 생체실험을 하기위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을 이용했다니, 초점 없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물론 전쟁과 싸움으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역사는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행해지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과 노인들,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합쳐 600만 명을 죽였다니, 아우슈비츠는 살육의 현장이요, 살인 공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의 그곳에는 독일인이나 유태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보려고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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