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토에세이

꽃사슴이 있는 섬

by 아네모네(한향순) 2022. 5. 28.

 

꽃사슴이 있는 섬

                                                                                                                   한 향 순

  봄기운에 대지와 나무에 물이 오르고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계절이 되면

인천시 옹진군에 있는 굴업도를 떠올리게 된다. 굴업도는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리기도 하고

백패킹의 성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아직도 때 묻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섬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불편하다. 당일로 다녀올 수는 없고 인천에서 덕적도에 가는 배를 타고

1시간 남짓 간 다음, 덕적도에서 굴업도행을 기다렸다가 다시 배를 갈아타고

한 시간 넘게 가야 목적지에 도착 할 수 있다.

굴업도에는 조그만 마을에 열 가구정도 살고 있는데 교통편이라야 마을 이장님이 운영하는 트럭이 고작이다.

미리 민박예약을 해야 마중을 나오시는데 트럭 짐칸에 짐과 사람을 함께 싣고 마을에 도착하면

옹기종기 붙어있는 조그만 집들이 보인다. 우리는 민박집에 짐을 풀고 주인아주머니가

차려주신 아주 소박한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

 

 

굴업도(掘業島)”라는 섬의 이름은 사람이 엎드려 일하는 모습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마을 너머에는 하얀 백사장이 둥글게 펼쳐진 큰말 해변이 자리한다.

해변의 서쪽에는 레저 단지 개발을 위해 설치한 펜스가 있는데, 열려 있는 철문을 지나면 곧 가파른 산길에 접어든다.

그렇게 십여 분쯤 숨을 헉헉대며 산을 오르자 탁 트인 초원이 펼쳐진다.

바로 개머리 언덕이다. 백패커들 사이에서 성지로 꼽힐 만큼 유명하고 그토록 와보고 싶던 곳이다.

능선에는 강한 바람 때문인지 큰 나무는 없고 억새와 수크렁 군락이 바람에 펄럭인다.

언덕은 가장 높은 고지가 백여 미터에 불과한데, 섬과 바다를 경계로 가파른

해식 절벽이 둘러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산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능선을 넘다보면 탁 트인 언덕에 수십 여 마리의 꽃사슴을 만날 수 있다.

오래 전에 탈출한 사슴 몇 마리가 지금은 백여 마리로 늘어 온 섬을 자기 놀이터처럼 헤집고 다닌다.

사람을 만나면 슬픈 눈망울로 빤히 바라보다가 해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서면 먹는 것에 열중한다.

그만큼 사람에게 오염되지 않은 천혜의 풍경이다.

굴업도는 1920년 까지만 해도 천 여 척이 넘는 배가 모여드는 민어 파시가 열렸던 곳이다.

선원과 상인들이 이천 명씩 북적였고 그들의 두둑한 주머니를 노리는 술집도 번성하였다고 한다.

19238월에 큰 태풍이 몰려와 천여 명이 피해를 입었고 동섬마을의 민어 어획량이 줄면서

서서히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굴업도는 두 개의 섬이 모래톱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 목기미 해수욕장과 두 개의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있다. 붉은 모래해변에는

한창때 세워진 전봇대와 끊어진 전깃줄들이 한때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해변으로 나오니 마침 썰물이 되어 모래 해변이 드러나 보이고 큰 바위가 보인다.

굴업도의 유명한 코끼리 바위는 코끼리가 코를 늘어뜨리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썰물 때만 볼 수 있는 기이한 바위이다.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 날, 아침부터 바다에서 희뿌연 안개가 밀려오더니 점점 섬을 삼켜버리고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해가 올라오면 안개가 좀 걷힐 것이라는 바람 속에 종일 기다렸으나 해무는 거센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배가 뜨지 못할 거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도 행여 늦게라도 오지 않을까 싶어 애타게 기다렸다.

끝내 배가 오지 않자 갑자기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 할 수 없어 우리는 깊은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토끼섬 해식동굴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해식동굴까지 가는 길은 바위가 험하고 뾰족한 돌기들이 있어 긴장이 되고 위험한 곳이다.

 

 

토끼섬의 동쪽 해식 절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긴 해식와가 발달되어 있다.

해안가 절벽이 파도에 의해 침식되어 생긴 작은 동굴이 수평 방향으로 이어진 특이한 지형이다.

파도와 염분에 의해 깎이고 파인 절벽이 장관이며 화산재와 암석조각이 굳어 생긴 절벽이

우묵하게 파인 터널형태로 길게 이어져있다.

검붉은 동굴이 마치 알 수 없는 거대한 생명체를 마주한 듯 외계행성처럼

태곳적 지구의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것 같기도 하다.

앞을 분간하기 힘든 희뿌연 해무에 갇혀 하루를 더 묵은 불편한 섬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훌쩍 다시 가고픈 섬이기도 하다.

 

 

 

2022년 봄호 <여행문화>

'포토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막을 오르며  (26) 2022.09.20
불탑의 나라 미얀마  (26) 2022.08.10
삘기꽃 연가  (0) 2022.05.20
해무에 갇히다  (0) 2022.03.14
겨울 산  (0) 2022.01.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