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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가톨릭 성지242

구례 화엄사 제일 먼저 들른곳은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자락에 있는 구례 화엄사이다. 주로 홍매화가 필때쯤 들르던 곳이었는데, 올해는 늦가을에 찾게 되었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및 문수·보현의 동자상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화엄사는 백제때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하여 절의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2021. 11. 15.
강화 연미정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에 위치한 강화팔경중에 하나인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자이다. 파란 잔디위에 지어진 조해루는 조선시대에 월곶진 검문소 역할을 하던 곳이다. 월곶돈대로 올라가는 길은 파란 잔디로 잘 가꾸어저 있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燕尾)라 하였으며, 조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 이곳에서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곳이기도 하다. 민통선 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됐던 강화팔경 중 하나인 `연미정'을 시민들에게 완전 개방했다.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24호인 연미정(燕尾亭)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정자로 북한 땅이 마주 보이는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월곶돈대 내에 위치해 그동안 군부대의 검문으로 일반인의.. 2021. 11. 3.
강화 정족산성 문화재 답사팀을 따라 강화 전등사 근처에 있는 정족산성을 찾았다. 정족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가파른 외측면 산세를 이용한 천혜의 군사기지로 알려져 있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위에서 둘러싼 능선에 산성을 쌓아 성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로 된 것을 말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현수 장군이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격퇴할 정도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강화도 정족산성(삼랑성)이 고조선 초기인 4천년 전 축조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 곧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전해지며 삼랑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다.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 2021. 10. 27.
원주 구룡사 추위가 오기 전인 10월 초, 원주에 있는 구룡사를 찾았다. 아이들이 어릴때 산행하며 들렸으니 몇 십년 만의 해후였다. 원주 치악산 구룡사는 1350년의 창건역사를 간직한 절이다. 구룡사는 의상대사가 668년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본래 이곳은 9마리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절을 지으려 하자, 이곳에 살던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하여 천둥과 함께 폭우를 내리게 하여 산을 온통 물로 다 채웠다. 그러자 의상대사는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연못속에 던져넣었는데 순식간에 연못의 물이 말라버리고, 이곳에 있던 9마리 용 가운데 한마리가 갑자기 눈이 멀어버렸다고 한다. 나머지 8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8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어느날 풍수를 볼줄 아는 노인이 나타나 "절 입구 거북바위 때문.. 2021. 10. 24.
단원이 그린 청심대 평창군 진부면에는 청심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단원 김홍도가 그린 "금강사군첩" 첫 페이지를 장식한 절경이 바로 "청심대"이다. 청심대가 절경이어선지 그곳은 슬픈 전설이 배어있는 바위이다. 조선 태종 때,강릉도호부사를 지낸 박양수와 관기 청심의 사랑이야기인데 한양으로 돌아가는 정인과의 이별이 안타까워 ,대관령을 넘어 이곳까지 함께 온 청심은 떠나가는 정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절벽 위 바위에 올라 낭떠러지 아래 계곡으로 몸을 날렸다고 한다. 돌아가면 또다른 상전을 모셔야 하는 관기의 운명을 죽음으로 매듭지어 버린 것이다. 꼭대기에는 예쁜 정자가 있어 아래를 두루 조망할 수가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습이 많이 달라지지만 감홍도의 청심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바위산 꼭대기에 뿌리를 내려 두 가지로.. 2021. 9. 29.
오죽헌 강릉에 온김에 옛기억을 더듬어 오랫만에 오죽헌에 들렸다 입구에는 재미있는 지폐가 보인다. .오죽헌의 뜻은 "검은대나무로 둘러싸인 집" 으로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자 율곡이이가 태어난 생가이다. 그러나 대관령과는 달리 강릉 날씨가 너무 더워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었다. 베롱나무꽃과 벌개미취는 요즘이 한창이어서 더위도 무색하였다. 자경문을 통과하여 오죽헌에 도착하니 땀이 등을 휘감았다,. 오죽헌을 언제, 누가 지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연산군 때 대사헌과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崔應賢,1428~1507)의 집이었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는 두 사람 다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원래 오죽헌은 최응현의 고택에 딸린 별당이었으며. 앞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팔작 기와지붕은 얻는 건물인데, 1963년 .. 2021. 8. 17.
오대산의 암자 오대산에는 다섯개의 봉우리와 다섯개의 암자가 있는데, 중대 사자암은 몇년 전, 적멸보궁을 가는 길에 들렸었고 이번에는 남대 지장암과 동대 관음암을 찾았다. 남대 지장암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비구니 사찰로 그중 깔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몇년전 ,제를 지내는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어 울창한 전나무 숲을 찾았더니 무슨 공사를 하였는지 꽃들은 전부 파헤쳐지고 변해 있었다. 동대 관음암은 정말 겨울에는 스님들이 어떻게 거동을 하실까 걱정스러울 만큼 가파른 언덕에 위치해 있는데 사람의 발길이 뜸한것 처럼 암자도 소박하고 엣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2021. 8. 10.
제주 황사평 성지 제주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제주시에 있는 황사평성지이다. 제주까지 왔는데 성지를 한군데라도 가보고 싶어 서둘러 찾아갔다. 황사평 성지는 1901년 신축교안때 희생된 분들이 모셔져 있다. 신축교안이 일어난 1901년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지 15년이 지난 때였고, 가톨릭 선교사가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전교 활동을 시작한지 채 2년이 못 된 때였다. 지방의 토착 관료들과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던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제주 신축교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렇듯 신축교안은 지방 관리와 기.. 2021. 7. 23.
과달루페 성모성지 세계의 여러 곳에 성모님이 발현하셨지만 로마 교황청이 인정한 곳은 오직 세 군데인데, 프랑스의 루르드와 포르투칼의 파티마, 그리고 멕시코의 과달루페 성지이다. 성지를 정리하다가 2008년 남미여행때 다녀 온 멕시코의 과달루페 성지의 기억을 떠올려 적어본다. 1531년 12월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멕시코의 테페약 산을 넘던 후안 디에고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멕시코 원주민의 모습을 한 여인은 당시 멕시코인들이 사용하던 토착어인 나후아틀어로 “나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다. 나를 사랑하고 믿으며 내 도움을 요청하는 지상의 모든 백성의 자비로운 어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디에고에게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나타난 장소에 성당을 세워달라는 요청하라고 했다. 디에고는 주.. 2021. 6. 23.
남양성모성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는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년 박해 때 이름 없이 순교하신 많은 분들을 현양하는 순교성지이며, 1991년 10월 7일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었다. 한국 천주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성지로 공식 선포된 곳이며, 우리 나라 유일의 성모 성지이다. 이곳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이 있다. 또한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실시하여 성모님 품 같이 아.. 2021. 6. 16.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해미순교성지기념관은 병인박해이후 1882년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하였는데, 숫자가 너무 많아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자들을 묶어 물속 둠벙에 빠뜨려 생매장을 시켰던 진둠벙과 해미천 옆에 생매장당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관을 세웠다고 한다. 처형된 신자의 유해들은 1935년에 서산성당의 주임신부.. 2021. 6. 10.
해미순교성지 안면도에서 올라오는 길에 천주교 성지인 '해미순교성지'에 들렸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순교성지가 올해 교황청에 의해 드디어 국제성지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기에 처형된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순례지이다. ] 2014년 교황청이 해미 처형자 3명을 가톨릭교회의 공적 공경 대상인 복자로 추대하였다. 같은 해에 교황 프란치스코가 복자로 추대한 처형자에 대한 시복식을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서 이곳도 직접 방문하셨다. 아래 교황의 동상이 보인다. .'여숫골'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조선의 가톨릭교회 박해 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던 장소이다. 조선 시대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렀던 해미현 관할 구역의 가톨릭교 신자들이 끌려와서 처형되었다. 이곳에서 처형된 가.. 2021. 6. 7.